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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독감 대재앙 오나] "사람끼리 전염 땐 18억 감염, 1억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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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류독감은 21세기의 흑사병이 될 것인가."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는 최근 섬뜩한 경고를 잇따라 내리고 있다. WHO 서태평양 지역 사무소장인 오미 시게루 박사는 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조류독감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에서 창궐하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방치할 경우 대재앙이 올 것이다. 우리는 당장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포린 어페어스 7~8월호도 특집기사를 통해 "앞으로 사람 간 감염이 가능한 변종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출현하는 경우 전 세계 60억 명의 인류 중 30%인 18억 명이 감염되고 5000만~1억 명을 사망케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 외교협회 선임 연구원인 로리 가렛과 미 국토안보부의 마이클 오스트홀름 국장은 '다가오는 세계적 전염병 (Next Pandemic)'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세계적 대재앙이 임박했다"며 "각국의 외교안보 책임자들은 이 경고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팬데믹이란 14세기 유럽 인구의 30%를 희생시킨 흑사병이나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1918년), 그리고 100만 명이 사망한 홍콩독감(68년) 등에 쓰는 용어다.

◆ 치명적인 Z 바이러스 출현=당초 과학자들은 철새에서 유래한 조류독감(Avian influenza 또는 Bird flu) 바이러스가 오리.닭 같은 가금류에만 전염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97년 홍콩에서 18명이 감염돼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아시아에서 조류독감에 걸린 사람은 64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20명 늘었다.

이 바이러스는 철새 → 오리 → 닭 →돼지 → 인간으로 전파되면서 새로운 숙주에 침투할 때마다 유전자가 재조합돼 변종이 생긴다. 98~2001년 아시아 전역에 퍼진 바이러스가 17회 이상의 유전자 재조합 과정을 거치면서 치명적인 변종이 나왔다. 2003년 1월 베트남과 태국에서 출현한 'Z 바이러스'다.

◆ 대재앙의 전주곡=2004년 초에는 더욱 치명적인 'Z+ 바이러스'가 등장했다. 기존의 바이러스는 생물체 내에서만 살 수 있지만 Z+는 죽은 동물의 고기나 닭똥에서도 생존하는 전례없는 특징을 지녔다. Z+로 아시아에서 1억2000만 마리의 닭이 폐사했다. 같은해 4월이 되자 포유동물인 돼지와 인간에 침투했다.

대재앙이 임박했다는 징조가 두 가지 있다. 첫째, 2003년에 68%이던 감염자 사망률이 2004년엔 36%로 감소한 점이다. WHO는 이에 대해 "유전자 변이를 통해 독성은 줄었지만 전염력은 더욱 강해졌다"며 "과거의 사례로 볼 때 이는 세계적 전염병 발생이 임박했다는 전주곡"이라고 분석했다.

둘째, WHO가 5월 아시아 회원국 회의에 제출한 연구보고서의 내용이다. "1월 베트남 북부에서 발생한 조류독감의 감염 유형을 관찰한 결과 바이러스가 점점 인간 대 인간 감염 쪽으로 변형되고 있는 사실이 나타났다." 환자가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유형이 사람 간의 전염병 전파 형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게 그 근거다.

최원기 기자

백신 개발 어디까지

조류독감을 예방하는 백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치료제로는 항바이러스제인 타미플루와 아만타딘을 써왔다. 그러나 아만타딘은 2003년 태국과 베트남에서 발견된 Z 바이러스에는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WHO가 3월 밝힌 바 있다. 스위스 제약회사 로슈가 생산하는 타미플루는 Z+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예방보다는 독감에 걸렸을 때 증상을 완화해 주는 정도다. 문제는 타미플루를 비축한 국가가 선진국에 집중돼 있을 뿐 아니라 비축량도 예상 필요량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이다. 조류독감의 인간 대 인간 감염이 가능해질 경우 개도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올 초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타미플루를 전략적으로 비축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스웨덴.캐나다.프랑스.호주 등 12개국 뿐이다.

포린 어페어스는 "현재의 Z+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 이른 시일 내에 개발될 전망은 밝지 않다"고 전했다. 백신 개발은 제조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1997년 홍콩에서 발생한 H5N1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데만 5년이 걸렸을 정도다. 또 일반적으로 백신은 '돈 안 되는 사업'이라 제약업계에서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바이러스가 해마다 변이되기 때문에 그때마다 새로 만들어야 하므로 비용이 많이 든다. 포린 어페어스에 따르면 2003년 독감 백신을 포함한 전체 백신 시장 규모는 54억 달러에 불과했다. 같은 해 전체 제약시장 규모(3373억 달러)의 2%도 안 된다. 백신이 개발된다고 해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유럽.북미.일본 등 일부 선진국 국민을 제외한 나머지 60억 명은 꼼짝없이 감염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기선민 기자

조류독감 경고 발언들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인간 전염을 막으려면 가금류를 광범위하게 방역하고 백신 개발 속도를 높여야 한다. 아시아에서 향후 2년간 조류독감 방역에 1억 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나 현재 10분의 1밖에 조성되지 않았다."

-2005년 7월 4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조셉 도메넥 가축위생 담당관

▶"조류독감이 창궐하면 수주일 내 최소 700만 명에서 최대 1억 명까지 사망할 수 있다."

-2004년 11월 29일. 오미 시게루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소장

▶"앞으로 몇 년 안에 강력한 전염성을 지닌 치명적인 독감이 세계를 강타할 수 있다. 이 경우 6개월 내 10억 명이 사망할 수 있다. 현존 독감 바이러스로부터 치명적인 변종이 생겨날 것인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다."

-2004년 10월 28일. 러시아 의학아카데미 산하 '이바노프 바이러스 연구소' 드미트리 리보프 소장

한국 정부 대책은

국내에서는 2003년 12월 11일 충북 음성군의 한 양계장에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됐다. 1997년 홍콩에서 사람에게 감염된 A/H5N1형 바이러스였다. 당시 보건 당국은 곧 WHO에 이를 보고하고 문제가 된 닭들을 폐사시키는 등 방역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2004년 3월까지 전국 19개 지역의 오리.닭 농장에서 잇따라 발견돼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관련 제품의 수출과 소비에 미친 파장도 컸다. 다행히 국내 조류독감 사태는 인체에 감염된 사례가 발견되지 않은 채 종결됐다.

질병관리본부 방역과의 박기동 과장은 "무엇보다 이 바이러스가 언제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 간에도 전염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 정부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정부는 WHO 서태평양지역본부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에 전문가 한 명을 파견해 조류독감 관련 조사를 위한 국제 공조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또 농림부와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4월 인수(人獸)공통전염병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올 연말까지 70만 명분의 항바이러스제(타미플루)를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이미 50만명분을 확보하는 등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질병관리본부와 전국 시.도 보건소 등이 합동으로 조류독감 환자 발생을 가상해 모의훈련을 하기도 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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