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385)제77화 사각의 혈투60년(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강일의 강과 약>
한국복싱 60년 사상 최고의 복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서강일을 꼽는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주먹은 허버트강이요, 테크닉에선 서강일이다.
키 l75cm인 서강일은 호리호리한 몸매가 얼핏보기에도 날렵하기 그지없다.
그는 원투스트레이트가 주무기이지만 어퍼, 훅. 모두 능란하다. 또 아웃복싱을 하다가 상대선수의 스타일에 따라 죽기살기의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하기도 한다.
몸통은 쇠약해 보이지만 마스크는 돌같이 강인하고 차가운 독기가 감돈다.
이러한 그의 생김새대로 그는 복서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골고루 다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성격마저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은 폭발성, 거칠기 짝이 없는 도전성에다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간교함이 뒤섞여 그러한 변전무쌍한 얼굴들이 링 위에서 그대로 주먹과 함께 춤을 춘다.
「엘로르데」와의 세계타이틀매치를 위해 65년11윌 출국하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 때 한 기자가 『당신은 「엘로르데」에 비해 펀치력이 너무 약한 것이 약점』이라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서강일은 분노와 미소가 뒤섞인 묘한 표정에다 날카롭게 째려보는 한편, 움켜쥔 오른쪽 주먹을 다른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선생님, 내 주먹이 과연 약한가 한번 맞아 볼래요?』라고 대들었다.
물론 싸움을 하겠다고 대든 것은 아니다. 의사표현이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링에 올라서서 상대를 맞이했을 때, 즉 경기스타일도 꼭 그런 식이었다.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승부에 대한 근성이 철저, 사생결단에 이판사판으로 자신을 완전히 불태워 버린다.
숨돌릴 겨를이 없이-첫 라운드부터 종료 공이 울릴 때까지-미친 듯이 전력을 다하는 전형적인 프로선수였다.
관객들로 하여금 박진감이 넘치고 통괘무비하며 또 한편으로 아기자기한 드릴을 만끽케 하는 그의 다채로운 테크닉은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는 컴퓨터 같은 센스와 탁월한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다.
확실히 그의 펀치력은 가공할 일발필도는 아니었다. 한방에 날려버리는 KO승은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속사포다. 상대선수는 무수한 탄흔에 만신창이의 벌집이 되어 고통스럽게 허물어지는 것이다.
서강일의 복싱센스와 도저히 잡히지 않는 번개같은 스피드는 물론 타고난 재주일수도 있지만 내가 보건대는 오히려 후천적인 요인의 작용이 더 크다. 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성장 과정은 다음 회에 소개한다.
천재는 노력을 덜하게 마련인가. 서강일은 도무지 연습에 게을렀다. 상대선수를 면밀히 연구하여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을 강구한다든가, 빅이벤트를 앞두고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훈련한다든가 하는 사전준비엔 영 관심이 없었다. 매니저이며 코치인 내가 강요한다고 진심으로 성의를 다해 순응하는 서강일이 아니었다.
서강일이 복서생활 중 가장 훈련을 끈기 있게 오래 한 것이 「엘로르데」와의 세계타이를매치를 위해 금수장호텔(현 앰배서더호텔자리)에서의 20일간 합숙이었다.
그 외에는 보통 경기를 l주일쯤 앞두고서야 규칙적인 연습을 마지못해 따르기 일쑤였다.
어떤 경우엔 -상대가 물론 약한 것이 틀림없을 때는 빈둥거리며 놀다 막바로 링에 오르기도 했다.
복서로서는 금기인 무절제한 생활에도 이상하게도 서강일은 체중조절에 고심한 일이 없었다. 제멋대로 술 마시고 포식해도 용케 체중이 늘지 않았다.
훈련태만은 서강일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스스로는 가끔 열심히 해볼 생각으로 연습에 들어간다. 그러나 꼭 경기날이 며칠 후로 다가오면 어김없이 밤마다 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를 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서강일이다. 어느새 빠져나가 외박하기 일쑤다. 물론 술과 여자와 더불어-.
금수장 20일 강훈 때도 사실은 세번이나 외박했다. 복싱스타일 그대로 하룻밤 주색과의 대결도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이러한 요인 등이 결국은 그의 선수수명을 단축시켰으니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