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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능 마피아, 진실을 조롱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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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논설주간

수능이 보름 뒤인 11월 13일로 다가왔다. 이 험한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을 짐작하는 부모라면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뉴스에 눈 감고 귀 닫으라고 할 것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최신 정보를 얻는 것도 금물이라고 외쳐야 한다. 오직 교과서만 마르고 닳도록 외우게 해야 한다. 그게 살길이다. 황당한 내용이거나 틀렸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 이 나라에선 교과서가 진리를 판정하는 유일신(神)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지식과 정보가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마당에 어째서 이런 시대착오적 부모가 돼야 하는 것일까. 수능마피아가 휘두르는 칼날에 베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전말은 끔찍하다. 지난해 11월 7일 치러진 수능의 세계지리 8번은 유럽연합(EU)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회원국에 대한 옳은 설명을 고르는 문제다. 교육과정평가원은 EU가 NAFTA보다 총생산액의 규모가 크다는 보기를 정답으로 정했다. 교과서에 수록된 2009년 통계치가 근거였다. 그런데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출제 오류라며 펄펄 뛰었다. 2010년 이후엔 통계치가 역전됐기 때문이다. 시험이 치러진 시점은 2013년이다. 평가원은 틀렸다.

 대입 전형 기간이 지나가면 피해 구제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평가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귀를 막았다. 현실과는 정반대의 낡은 통계가 실린 2개 교과서를 바이블이라고 우겼다. 한국경제지리학회와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도 출제에 이상이 없다는 의견을 평가원에 제출했다. 폭넓게 공부해 최신 흐름을 알고 있는 학생들은 한순간에 바보가 됐다.

 지난해 세계지리를 선택한 학생 3만7684여 명 가운데 절반인 1만8884명이 배점 3점인 8번 문제에서 오답 처리됐다. 쉬운 수능이어서 3점을 감점 당한 사람은 누구도 1등급을 받지 못했다. 일부가 소송을 제기하자 평가원은 대형 로펌에 송사를 맡겼다. 법원장과 부장판사 출신을 포함한 6명의 변호사가 힘없는 피해자들을 상대했다. 지난해 12월 16일 1심 재판부는 평가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달 16일 열린 2심에서는 거꾸로 수험생이 이겼다. 하지만 ‘수능 세월호’에 갇힌 악몽의 10개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걸 잃었다. 명백한 오류가 진실을 능욕했다.

 평가원은 일관성도 없었다. 수능 출제 전인 지난해 3월에는 분명히 “교과서 밖의 소재나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 및 시사적인 내용 등에서도 출제한다”고 했다. 그런데 출제 오류가 문제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과서를 기준으로 내세웠다. 이러니 “닥치고 교과서!”를 외칠 수밖에 없다.

 단 한 개의 시험 문제로 당락이 갈리는 게 우리의 입시 시스템이다. 그래서 이미 반세기 전에도 ‘무즙파동’으로 불리는 출제 오류 소동을 겪었다. 1964년 12월 7일 치러진 서울시 전기 중학교 입시에서 벌어진 일이다. 교육 당국은 자연 과목에서 엿을 만드는 데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으로 ‘디아스타아제’를 정답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무즙을 선택한 학생들의 부모는 “무즙으로도 엿을 만든다”며 시위까지 벌였고 소송을 냈다. 다음 해인 65년 3월 30일 법원은 학부모의 손을 들어 불합격자를 구제하라고 판결했다. 5월12일 경기·서울·경복·경기여중 학생 38명이 전학 형식으로 구제됐고, 문교부 차관과 서울시 교육감이 물러났다.

 ‘무즙’과 ‘세계지리’는 같은 출제 오류였지만 결과는 같지 않다. 50년 전에는 우여곡절 끝에 피해 학생들이 첫 학기 도중에 구제되고 중학 입시도 4년 뒤 폐지됐다. 하지만 세계지리 사건은 1년이 다 돼 가도록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하향지원을 한 대학에 다니거나 재수 혹은 반수 상태다. 상당수는 보름 뒤면 지긋지긋한 수능을 또 치러야 한다. 이게 교육부와 평가원의 출제·검토 과정을 장악한 특정 학맥의 수능마피아를 주축으로 한 학회·대형 로펌의 연합군이 저지른 폭력이다. 반백 년 동안 사회가 발전하고, 전문가 집단이 늘고, 시스템이 진화했는데 진실과 정의가 후퇴한 역설(逆說)의 현실이다. 힘이 센 연합군은 “옳은 것을 선택하면 신세를 망친다”는 나쁜 경험을 학습시켰다. 문명사회의 상식을 파괴한 행위다. 이러고도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창조적 사고를 가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이성(理性)의 세계로 돌아가자. 교육 당국은 출제 오류를 깨끗이 인정하고 상고를 포기하는 게 맞다. 진실을 조롱한 죄, 힘없는 피해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혈세를 대형 로펌에 갖다 바친 죄를 뉘우쳐야 한다. 국가가 휘두른 폭력에 울고 있는 피해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찾아내 대학에 정원외로 입학시키고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 ‘수능 세월호’의 생지옥을 만든 수능마피아는 해체하는 게 옳다. 그게 최소한의 정의와 신뢰를 살리는 길이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