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때싹튼 반소성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어쨌든 이시기에 소련에 들어간 사람들은 처음에는 오케안스크에서 휴양과 억류를 겸한 생활을 했고 그후에는 극동군구사령부(사령관「아파나센코」대장)직속의 정찰국(국장「조르킨」 소장) 관할로 넘겨졌다.
소련군극동군구정찰국은 바크에 병영을 만들어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집단수용, 이들에게 장래 일어날 대일전쟁을 대비해 교육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제88특별여단이라고 명명된 이부대의 장에는 동북항일연군지도자의 한사람인 주보중(중국인·항일연군제5군군장)이 취임했다.
또 정치부 여단장에는 「세료킨」소령, 여단참모장에는 「시린스키」소령, 그리고 여단 정치부 지도원에는 장수전(=이조림·중국인·항일연군제3군군장), 풍중운 (중국인·항일연군 제3군 정치위원) 등이 각각 임명됐다.
제88특별여단을 조직한 주요목적은 소련과 일본간에 전투가 발생하는 경우 한국과 중국의 지리에 밝은 빨치산투쟁경험자를 정찰활동에 이용하기 위해 미리 훈련을 시켜두자는데 있었다.
소련군부내에서는 한국인과 중국인 빨치산대원을 소만국경지대의 가장 적당한 길안내원,그리고 유능한 정찰요원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제88특별여단의 총인원은 2백여명이었다. 한국인은 부인까지 전부 합쳐 약60명, 중국인이 약1백명, 그리고 나머지는 소련군요원이었다.
이가운데 당시 군사칭호가 가장 높았던 인물은 군의 이동화소령이었다.
다른사람들은 대부분 소위에서 대위까지의 위관급 군관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