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9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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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가 원대복귀된 것은 우리 여단이 북으로 이동함으로 해서 늘어난 외곽경비 때문에, 파견된 인원의 귀대가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 몬순이 닥쳐왔지만, 적의 공세가 시작되고 있어서 우리는 주요 도시의 방어를 위해서 남으로부터 북상하라는 작전명령을 받았다. 사령부가 의도하는 것은 평정된 우리 지역의 치안을 남베트남 정부군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월초부터 면밀하게 계획된 철수가 조심스럽게 시작되었고, 전 여단은 중대별로 새로운 지역에 투입되어 갔다. 정부군에게 여단본부 지역을 인계하기까지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소속 구분없는 2개 중대 병력의 최종 후발대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내가 받은 승선 넘버는 재수없이 후발대 속에 끼어 있었다.

내가 본대에 도착하기 전 R-POINT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적은 곧 물러갔지만 몇 명의 전상자가 생겼으므로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누군가 차출되어야만 했다. 파견되었던 인원은 여섯 명이었는데, 본대의 동료들은 모두 외곽방어에 나갔거나 선발대로 떠났기 때문에 우리들 중에 누군가 R에 가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제비뽑기를 제의했고, 모두들 찬성했다. 국도로 나가는 도로 정찰차가 출동하기 직전에 우리는 잠깐 카드 놀이를 했다. 내가 쥔 패는 끗발이 제일 약했고, 중대장에게 신고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 그러구 보니까, R의 임무는 뭐야? 도대체 모두 철수해버린 보급대대 앞 노상을 지킬 무슨 이점이라두 있나?

- 탑이 있거든.

- 탑이라니….

- 그전엔 여기 사원(寺院)이 있었어. 무너진 사원을 불도저루 밀어낼 때 주민들의 반대루 탑만 남겨 놓았거든. 월남인들의 감정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부대 진주 초기부터 지켜왔던 거야. 우리는 저 탑을 적이 옮겨가지 못하도록 무사히 보존했다가 정부군에게 물려주는 거지. 저 따위를 지켜야 된다구 생각해낸 자들은 바보야. 전략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가 어떻다느니 하지만, 이놈의 전쟁은 시작부터가 전략적이라 그 말이지.

장난감과 같은 작은 탑을 지켜내야 하는 일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지프에 실려 이곳으로 오면서 느꼈던 공포감마저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그것은 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물건이었다. 초소와 숲 사이의 마당에 사람 두 키 정도의 높이로 세워져 있는 보잘것없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해병 여단이 출라이에서 호이안으로 이동을 시작하고 나서 후발대는 여단본부 지역을 방어하다가 정부군에 넘겨주기로 했는데 나는 후발대 소속이었고, 이것이 베트남에서 사실상 나의 마지막 전투 경험이 되었다. 소설 '탑'에 묘사한 대로 나는 어느 작은 교통 초소를 확보하고 있는 매복 분대에 배속되었다. 현실에서도 부근에 사원이 있기는 했지만 탑 따위는 없었지만, 그 비슷한 것은 있었다. R 포인트 바로 뒤에 얼굴이 반쯤 깨어져 나간 보잘것없는 불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가 그것을 지키는 일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1번도로와 여단본부로 가는 작전도로가 만나는 교통 지점을 확보해 두었다가 남베트남군의 주력이 무사히 진입하도록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임무였던 것이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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