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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책자 모두회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김일성의 공로를 인공적으로 과장하고 그 경력을 위조, 미화시켰던 이책도 지금에 이르리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신격화의 증거물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또 김일성이 1931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씀으로써 당시 공산당이 없었으므로 김이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부주의하게도 폭로해버렸다. (이나영· 조선민족해방투쟁사 338페이지).
오늘 북한어용학자·「주체」 광신자들이 성경을 노래하듯 김일성은 1926년에 주체사상(즉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사상)을 창조하고 자주의시대(즉 김일성시대)의 새기원을 열었다고 하는 대사에 이나영은 본의에 반해 금일성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그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또 1940년8윌10일 조국해방의 전략전술적 문제를 토의했다고 하는 역사적인「소합비이령회의」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위 책이 출판될때만 하더라도 이같은 역사적회의를 창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조선민족투쟁사』를 김일성일족의 위조된 족보로까지 끌어올렸던 이책이 한단 더 높아지려는 김일성에 의해 분서갱유의 운명에 빠진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하다 할 것도 없는일이다.
이책보다도 2년뒤에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낸 임춘추의『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며』 (1960년 평학)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을 절세의 영웅으로 추켜세운 이 책도 몇년 못가 김일성신격화의 요구를 충분이 채울수 없었다. 이런경우 어느정도 거짓을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진실을 어느정도 남겨놓았느냐가 문제가 된다.
한두가지 예를 들어보자.
임춘추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1936년2월 「남호두」 에서 있었던 이같은 사실을 자신이 쓴 책에 넣음으로써「조국광복회」가 김일성의 독창적 발상으로 조직된게 아니고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집행한 것일 따름이라는 사실, 그것도 중국 위증민동지의 직접지도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50년대에는 누구의 눈에도 파렴치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김일성을 찬양한 문장이 60년대에 들어와서는 설화가 될 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해방직후 김일성은『동북항일연군투쟁사략』 의 저자 관기신의 질문에 답한 일도 있지만 중국 사학자들과의 대담은 지금도 김일성이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록들은 그자신의 영향권 밖에 있어 마음대로 바꿀수 없는 것이기때문에 말하자면 자신이 만든 「설화」인 셈이다.
김일성이 앞에나온 구술필록에 응한 것은 1945년 말부터 46년초였던 것같다. 이때 김은 자기의 경력과 공로를 크게 위조하거나 과장하려는 의도는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련의 앞잡이란 비난구실을 주지않기위해 사실상 패잔병이돼 소수의 대원을 이끌고 소련으로 도망했던 시기를 동북지방에서 소규모활동을 했다고 날조한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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