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기 (전 영남대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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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3·1 운동이 한참이던 1919년 나는 지금의 경북고 자리인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일본인들이 세운 관립학교였지만 학생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민족차별에 대한 울분과 상급학교에 마음대로 진학할 수 없도록 한 교육제도를 철폐해 줄 것등을 주장하며 스트라이크나 동맹휴학을 벌이던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2백50명의 전교생 가운데 키가 가장 작았고 나이도 14살로 가장 어렸던 나는 인문교육보다 실업교육 위주이던 학과공부에 흥미가 없어 30세까지의 나이많은 상급생들을 따라다니며 일본인 교사배척에 열을 올리곤 했다.
일본인 교사보다도 민족혼을 일깨워 주던 동료학생들이 실질적인 스승이었던 셈이다.
1학년때 가을 어느날 교실한구석에서 누군가 『미국대통령이 조선을 독립시키기위해 비행기로 날아 온단다. 우리 모두 나가보자』고 소리쳤다.
우르르 운동장으로 뛰쳐 나갔더니 순식간에 전교생이 모여들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한없이 기다렸으나 비행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때가 바로 「월슨」대통령이 세계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날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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