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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영양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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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정을 잊고 나라일을 걱정함은 충이요, 적을 이겨 난리를 극복함은 장이며,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것은 효이니라」(우구망가왈충, 승적극난왈장, 위친지성왈효).
4백년전 임진왜란때 명나라의 이여송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됐다가 우리나라에 천씨가 문을 연 천만리장군이래 대대로 내려오는 영양(영양)천씨의 가헌이다.
세손들은 이를 단순한 명구로 받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생활철학으로 살천하여 조선명륜록에 5대연속 효자가 기록되었는가 하면 양장신신등 각계에 두드러진 인재를 배출했다.
천씨는 2백49개의 우리나라 섬가운데 인구수로 53위. 전국에 1만5천9백30가구, 약9만여명이 살고 있다.
본관은「영양」단본. 이밖에 개성·강화·광주등 무려 97본이 있으나 이는 모두 영양천씨의 세거지를 나타낸 것 일 뿐이다.

<이여송과 같이 와>
시조는 명나라초기의 조신인 천암. 영양천씨세보에 따르면 시조인 천암은 명나라 홍무원년(1368년) 도총장에 오르고 후에 판도승상(영의전에 해당)까지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노나라 영양땅에 살았으므로 그 지명을 따라 본관을 정했다고 한다.
천씨의 중시조 천만리는 천암의 16대손.
이조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로부터 청병을 받아 총륜사 이여송과더불어 조병령량사겸 총독장(군수사렴관겸 전투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아들 양·납와 함께 부하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온 천장군은 평양과 곽산·동래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삼전삼첩의 전과를 거두었다.
장군은 전란이 평정된후 모든 병사가 개선회군하였으나 휘하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대로 남아 우리나라에 귀화, 천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일등공신으로 격찬, 정이품 자헌대부봉조하(죽을 때까지 현직과 같은 녹을 받는 벼슬을 봉조하라함)와 화산군(임금의 가까운 친척이나 나라에 공이 큰 신하에게만 주는 벼슬)으로 봉하였고 가헌의 뜻이 담긴 충장공이라는 시호(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천씨가문은 조국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큰 시련을 겪는다. 앞서의 임신·정서의 두 왜난으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 후금이 일어났고 인조14년(1636년)에는 국호를 청이라 바꾼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한 태종이 10만대군을 거느리고 침입(병자호란), 조정은 오랑캐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시 항복문서내용에는 명에서 귀화한 사람들을 잡아들이라는 조항도 들어있어 천장군의후손들은 심산유곡으로 피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식솔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지금의 충북 제천, 경북 안동, 문경 선산,청도, 경남 고성, 전남 고흥, 해남, 부산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일부는 고국의 이름이 붙은 북쪽의 명천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국각지에 숨어설던 천씨들은 그 후 관직에도 나가지 못한채 농사와 고기잡이등으로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다행히 이조말에 이르러 전국유림에서 천씨조상의 빛나는 공훈을 그대로 묻혀둘수 없으니크게 포장하고 제단을 세워 향사를 모시도록 임금에게 상주함으로써 면목을 되찾을수 있었다.
이에따라 숙종때는 「대보언」을 설치했고 순조때는 고성군동해면장좌동의 호암서원, 헌종때는 청도군금천면갈지리의 고강서원에서 향사를 베풀었다.
천장군묘라고 불리는 중시조의 무덤은 남원환봉산에, 그의 아들 양·납의 묘는 동성에 있다. 또 부산시범일동 자성대공원의 진남대 바로 옆에는 임진왜란이 평정된 직후 관민이 합동으로 건립한 전첩비가 남아있어 천만리장군의 공적을 후손에게 전해주고 있다.
천씨 문중의 역대인물중에는 철종때의 문과 급제자인 천일성, 고종때의 천광진과 성리학자로 이름높던 천위영, 그리고 영조때의 대호군겸 오함장이던 무신(무신) 천세필, 천우대, 천상하등이 있다.
또한사람 송석원 천수경이 빼어난다.
그는 순조대의 시인으로 왕류천근처의 소나무 바위아래 초당을 짓고 송석도인으로 자처하며 송석원시사(혹은 서원시사)라는 동인모임을 만들었으며 당시 시인으로 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면 격이 떨어진다고 할만큼 유명했다.
그무렵 여기에 모였던 시인들은 장혼·조수삼·차좌일을 비롯 김낙서, 왕대 박윤묵등 쟁쟁한 명성을 떨치던 사람들이었다. 송석원시사는 당시 서민문학의 모체가 되어 우리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수경은 시로 유명>
천수경은 시만 즐긴것이 아니라 기인다운데가 많았다. 그에게는 아들다섯이 있었는데 이름을 일송·이석·삼족·사과·오하라고 지었다. 일송과 이석은 자신의 아호에서 땄거니와 삼족은 아들이 셋이니 족하다는 뜻이요, 사과는 너무 과하다는 말이고 오하는 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밖에 근세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항일독립전선에서 활약한 인물도 많다.
구한말 이강년의 좌익장이던 천보낙을 비롯, 고종때 외부주사를 지내고 도미,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고 상해임정에도 참여한 천세헌, 1919년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우규등과 노인단을 조직하여 그 창립간부로 활약한 천수절이 빛난다.
6·10만세운동과 일제말기 신사참배거부로 두차례나 옥고를 치른 천세광목사, 그는 해방후 성결교회 재건총회 회장에 선임되어 서울신학교를 창설하고 복음전도관을 세우는등 교회발전에 이바지했다.
현세에 이르러서는 재무부장관을 지낸 천병규씨, 국회의원·교통부장관을 역임한 천세기씨(작고), 현보사부장관 천명두씨, 국회의원 천영성씨, 국방대학원장을 거쳐 병무청장에 임명된 천주원씨, 전KIST소장 천병두박사, 천관정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장, 여류화가 천경자씨등등 가문을 빚낸 인물들은 일일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 세기씨와 명기씨는 친형제간으로 한집에서 국회의원·장관이 나온 셈.
62년 증권파동을 치렀던 천병규씨(14대재무장관)는 현재 동방철관회장으로 활약, 동양화가 천경자씨는 『인간적인 체취와 예술적 향기에 있어 우리 화단의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 알려진 여류. 여류화가로는 처음으로 71년도 서울시 문화상(제20회)를 수상.
언론계 원로이며 사학자인 천현자씨는 충북 제천산. 한국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를 두루거치며 한때 체제비판의 선봉에 섰던 그는 81년 『통일문제에 정파가 따로 없다』는 소신을 펴며 순수 민간통일촉진운동기구인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장에 취임, 통일실천에 활동중. 서울지검 천기흥검사는 그의 조카.
조선조의 5대효행가문의 전통을 이어 79년 중앙일보 효행대상수상자 천필달씨(사천출신)가 있고 프로레슬러 천규덕씨(마산출신)는 최초의 미국유학 프로레슬러로 한때 김일선수와 콤비를 이뤄 어린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한국전통의장 자료에 관한책을 펴낸 여류건축가천병옥씨는 서양화가 천병저씨와 남매간이다.

<지명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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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회제공·가나다순> 글·홍성호기자 사진·김주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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