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김광일<한양대병원 신경정신과>(233)|가면성 우울(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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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단정한 용모의 중년부인이 찾아왔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몹시 지쳐있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진찰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아픈 데가 한두 곳 아닌데 의사들은 병이 없다고 하니 이젠 의사도 모르는 중병에 걸려 죽게 됐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가슴이 무겁고 숨이 답답하고 피로하고 소화도 안되고 변비가 심하고 잠은 들지만 새벽 2시께 깨면 다시 잠들 수 없어서 2년간이나 고생했는데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진찰을 받아본 결과는 매번 병은 없고「신경성」이라고만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약국에서 신경안정제를 사서 복용해보기도 했고, 한방을 찾아 보약을 달여먹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신경정신과를 방문했는데 여기서도 뭔가 분명한 결말이 안 나면 자살할 각오까지 했다는 것이다.
자세한 상담결과 깊이 숨겨진 우울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였으나 가정생활로 인한 슬픈 감정·의욕상실·허무감·열등의식·흥미상실 같은 우울 감정이 잠재해 있었다.
이렇듯 신체증상은 겉으로 나타나고 우울 증상은 속에 깊숙이 숨겨진 상태를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한다. 웬만큼 자세한 진찰이 아니고서는 속에 숨겨진 우울증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몸의 병만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우울증은 신경안정제정도로 해소되지가 앉고 보약이나 소화제 같은 약물로도 효과가 없다. 특수한 종류의 항우울제를 2∼4주간 복용해야 비로소 신체적 괴로움은 물론 우울증상도 회복된다. 자살의욕이 강하면 입원치료를 받아야하지만 가면성우울증은 자살의욕이 겉으로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외래치료로도 가능하다.
우울증은 책임감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려는 성격에서 잘 생긴다. 무엇이나 l백%이상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기 모멸감 때문에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신체증상이 겉으로 나타나고 우울증이 숨겨지는가.
아주 괴로운 우울한 감정을 여러 가지 신체증상으로 덮어두고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도 이유가 되고, 우울한 감정을 노출시켜봐야 누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주위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신체증상으로 표면에 드러나는 것도 이유가 된다.
최근 우울증환자가 늘어가고 있다. 급격한 문화변천, 이를테면 극심한 경쟁사회·핵가족제도·전통적인 보호분위기의 붕괴 같은 근대사회의 생활여건이 우울증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울증은 치료를 받으면 확실히 회복되는 병인데도 신체의 병으로 잘못 판단, 방황하면서 고생하는 이들이 꽤나 많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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