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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고사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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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영목
번역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종이 울리면 자리에 앉는다.”

 교실 앞쪽 벽에 붙은 급훈이다. 이렇게 담백한 급훈은 본 적이 없기에 나도 늦었지만 가훈을 정해볼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아침이 오면 일어난다.” 너무 건전한가? “비가 오면 술을 마신다.” 이건 너무….

 이른 아침부터 교실에 앉아 있는 여자 아이 스무 명이 내 머릿속의 이런 한가한 잡념을 모르는 게 다행이다. 그들은 수험생이고 나는 오늘 시험 감독이다. 앞으로 무려 다섯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그 사이를 어슬렁거릴 것이다. 책도 전화기도 들여올 수 없으니 긴 시간 동안 한 가지 문제를 꾸준히 생각할 능력이 없는 나에게는 돌아다니며 그림을 구경하는 게 큰 낙이 될 것이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백지에서 어떤 형태가 완성돼 가는 과정은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데가 있다.

 준비물을 점검하다 한 아이가 종이테이프를 가져 오지 않아 당황하자 어떤 아이가 선뜻 나서서 나누어준다. 시험을 보러 왔지만 경쟁자이기보다는 한 배를 탄 동료다. 이제 곧 해야 할 일 때문에 긴장하고 있지만 다른 아이들 때문에 긴장하지는 않는다.

다들 편한 차림이지만 그럼에도 풀어진 느낌은 아니며, 하나같이 길게 기른 머리에는 윤기까지 흐른다. 저렇게 다듬기 위해 새벽 몇 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을까? 입시일에도 해 뜨기 전부터 정성껏 머리를 매만지는 아이들을 상상하자 새파란 힘이 느껴져 잠이 달아난다.

 아이들 앞에 놓인 백지에 서서히 형태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스무 살이 안 된 아이 스무 명이 좁은 방에 모여 집중을 하니 그 열기가 물리적 에너지로 다가온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손부채질을 하는 아이가 있다. 삼분의 일은 아예 일어서 있다. 두 시간이 지나자 거의 다 일어서서 그린다. 많은 아이가 한꺼번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광경은 왠지 숙연하다.

 아이들은 가끔 주변 그림을 기웃거린다. 아마 그 그림이 자기 것보다 나은지 못한지 대번에 알 것이다. 사실 여기 있는 스무 명 가운데 합격자가 될 아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문제를 잘못 이해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아이도 있는데, 그 아이는 앞으로 네 시간 반 동안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도 그 극소수 안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시험이 끝나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탈락을 알고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잊는다. 아이들에게는 오직 눈앞의 그림만 존재한다. 우열과 당락마저 넘어선다. 자신의 손에서 흘러나와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가는 자신의 창조물만 있을 뿐이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가 그들의 창조물인 자식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자식의 가치가 우열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아이들에게 자기 그림의 가치는 우열에 있지 않다. 그 그림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해 빚어내는 창조물이기에 가치가 있다. 아이들은 그 창조의 순간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하고 있다.

 나 또한 아이들의 몰입에 몰입한다. 나도 아이들과 한 배를 탄 듯하다. 햇빛을 막으려고 블라인드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교실이 아니라 선실에 함께 있는 느낌이다. 몸마저 아이들과 동조하는지 더운 느낌이 들어 재킷을 벗는다. 닫힌 곳에서 함께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 속에서 수험생과 감독은 사라지고 집중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인간들만 남는다.

 마칠 시간이 다가오자 서너 명만 빼고 모두 자리에 앉아 있다. 문제를 잘못 이해했던 아이는 끝나기 5분 전에 실수를 깨닫는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 씁쓸한 미소를 한 번 흘릴 뿐이다. 울 거라고 지레 짐작했던 내가 부끄럽다. 아이의 젊은 부력이 부럽다. 그래, 그런 부력 덕에 이 배는 침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락이 이 배를 침몰시키는 파도로 몰아쳐 이 선실에 있는 아이들이 막막한 바다를 떠도는 슬픔이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창조와 몰입의 다섯 시간이 긴 항해에 소중한 구명조끼 노릇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일어선다.

정영목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