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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영화] 조금은 낯선 이와이 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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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의 영화에는 언제나 소녀가 나온다. 소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그녀를 둘러싼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화사한 소녀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충만한 생명력이 전달된다. 이전에 개봉했던 '러브 레터'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를 보았다면 '순애와 청춘'이 이와이의 정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영화는 투명하다. 눈이 아릴 정도로 밝게 빛나는 어떤 순간이 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그 빛 속에서 살아가거나, 그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본 일본 영화 '러브 레터'의 주인공 히로코가 이미 죽은 연인을 향해 설산에서 "오겡키데스카"를 외치듯이. '4월 이야기'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순간의 황홀함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으로 변해버리는 그 순간을

그것뿐일까? '이와이 월드'에는 찬란한 청춘의 빛과 사랑의 기적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가 개봉되지 못한 채 몇 년씩이나 창고에 묻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이와이는 순애와 청춘의 작가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만큼 어리석지 않다.

'릴리 슈슈…'은 '하나와 앨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영화다. 학교에서는 집단학대를 당하고, 집에서는 릴리 슈슈라는 가수에게만 몰두하는 소년.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을 때만, 그는 자유롭고 행복하다. 이 세상은 끔찍하고, 가상의 세계만이 도피처다. '스왈로우테일…'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온 사람들의 빈민가 엔타운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이야기. 다른 작품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인간의 탐욕과 절망, 대량의 피와 시체를 마음껏 보여준다. '피크닉' '언두'는 정신이상자들의 기묘한 피크닉과 강박증에 걸린 여성의 기묘한 사랑 방식을 그린다. 이 세상에서 쉴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서글픈 몽상을.

이와이는 빛의 이면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그림자가 있기에 빛이 더욱 찬란하고 황홀함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빛과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대비시키지 않는다. 그냥 모든 것을 흐름으로 보여준다. '스왈로우 테일…'의 창녀 그리코는 아무런 과장이나 거짓 없이 가수가 된다. 부끄러워하지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피크닉'의 그들은, 자신의 죄가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둠과 그림자가 그들의 맨 얼굴을, 사소한 일상을 빛나게 한다. 이와이는 참혹하고 굴욕적인 순간까지 아름다운 판타지의 세계로 포획해내는 마력이 있다.

조금씩 흔들리며 마음의 궤적을 따라가는 듯한 카메라, 망설이고 비틀거리면서도 나아가는 인물들,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음악이 모든 것을 장악해버린 순간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기적으로 바꾸어버리는 바로 그 찰나가 이와이의 영화 모두에 담겨 있다. '하나와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춤을 추자 사람들이 홀린 듯 바라보는 것처럼 '피크닉'의 담 위의 모험과 엔딩, '스왈로우테일…'에서 아게하의 담담한 얼굴, '릴리 슈슈…'의 고요한 풀밭, 그리고 '언두'의 거리에서 나누는 키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모두가 기적의 순간임을 일깨워준다. 그것이 바로 이와이 영화의, 판타지의 힘이다.

영화평론가 김봉석

*** 미공개 작품 4편 동시 상영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감독 : 이와이 슌지
주연 : 이치하라 하야토, 이토 아유미, 아오이 유우, 오사와 타카오
장르 : 드라마
등급 : 15세

내용 : '릴리 슈슈'라는 아이돌 여가수를 좋아하는 소년 유이치는 아이들의 괴롭힘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 자신이 좋아하는 쿠노 역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유이치는 자신한테 닥친 일을 버거워하며 돕지 못한다. 유이치의 안식처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달래줄 '릴리 슈슈'의 노래뿐. 그는 인터넷에 '릴리 슈슈' 팬클럽을 만들어 익명의 사람들과 사이버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20자평 : 청춘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프다.

◆ 피크닉

감독 : 이와이 슌지
주연 : 차라, 아사노 타다노부, 하시즈메 고이치
장르 : 드라마
등급 : 15세

내용 : 검은 까마귀 깃털 옷을 입는 코코, 선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년 츠무시, 코코를 좋아하는 사토루. 이들 셋은 병원의 내부와 외부 어는 곳에도 속하지 않은 담 위를 다닌다. 그러던 중 그들은 성경에서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담 위를 걸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사토루는 담이라는 공간에서조차 밀려나고 결국 코코와 츠무시만이 여행을 계속한다.

20자평 : 담은 길고 삶은 짧다. 그리고 영화도 짧다.

◆ 언두

감독 : 이와이 슌지
주연 : 야마구치 토모코, 도요카와 에쓰시
장르 : 드라마
등급 : 15세

내용 : 약혼녀 모에이와 동거하는 작가 유키오는 바쁜 일상들 때문에 모에이가 외로움에 점점 변하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어느 날 모에이는 유키오가 선물한 거북이를 줄로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다. 그 후 그녀의 증세는 점점 심해져 집안 내의 모든 물건을 묶기 시작한다. 모에이의 증세를 걱정하던 유키오는 의사의 충고대로 모에이를 묶는 방법으로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한다.

20자평 : 저예산 독립영화의 향기가 느껴지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

◆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감독 : 이와이 슌지
주연 : 미카미 히로시, 이토 아유미, 에구치 요스케
장르 : 드라마
등급 : 18세

내용 : 엔화를 벌기 위해 여러 나라의 불법 이주민들이 도쿄 변두리 '엔타운'에 모여 산다. 그곳에서 창녀 그리코와, 그리코가 지어준 이름을 받은 소녀 아게하, 페이 홍, 란은 함께 지낸다. 어느 날 그리코가 손님과 시비가 붙어 곤경에 처하자, 옆방의 권투 선수 출신인 흑인 아론이 말리다 사고로 손님을 죽인다. 시체를 처리하는 와중에 죽은 손님의 뱃속에서 테이프를 발견하고, 이후 테이프를 놓고 쫓고 쫓기는 사건들이 주변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20자평 : 사소한 출발에서 막대한 스케일을 가능케 한 촘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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