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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358)|화맥인맥 월전 장우성(77)|낙선 작품 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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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가 서울대 미술대학을 그만 둔지 얼마 되지 않아 홍익대에서 출강을 의뢰해왔다.
그때 홍대미술대학장은 나와 서울대미술대학에 함께 있었던 수화(김환기)가 맡고 있었다.
수화가 내게 이봉상씨(서양화가)를 보내 출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 이봉상씨에게 서울대를 사임한지도 얼마 안되고 또 화숙에서 제자들을 기르고 있어 짬이 없다고 사양했다.
사실 짬이 없다는 것은 구실이었고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수화가 직접 찾아왔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나 좀 도와 달라』고 사정했다.
우정을 내세운 수화의 간청에 홍대 출강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대에 나갔더니 학장 실에 마침 청전(이상범)선생이 나와 있었다.
학장 실에서 청전·수화와 내가 마주 앉아 차를 들고있는데 이봉상씨가 들어왔다. 이봉상씨가 나를 보더니 나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청전 선생도 『월전이 홍대에 나온 것은 홍대 학생들의 영광이다』고 내 출강을 환영했다.
홍대에 출강하면서 전부터 알고 있는 천경자씨 하고도 자주 만났다.
천씨가 그때 동양화과 주임으로 있어서 이런저런 의논의 대상이 되었다.
홍대에 출강한지 1년 남짓해서 나는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63년7월) 부득이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에게 미국에 가게 되어 서운하다는 인사를 했더니 그들도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던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벽경 송계일군이 주동, 교실에서 벌인 다과 송별회는 퍽 인상적이었다.
새삼 인정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자리가 되어 미국 생활 중에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나는 미국에 가면서 내 화실과 집기일체를 남정(박노수)과 심경(박세원)에게 물려주었다. 이들에게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까지 인계해 줬는데 오래 하지 못하고 제당(배 염)이 넘겨 받았다.
미국에서 3년 동안의 생활을 끝내고 66년에 귀국해서도 홍대와 재차 인연을 맺었다.
귀국 후 한국일보사 뒤 수송동117번지에 한옥 2층을 전세 내 화실을 꾸몄다.
화질을 내고 지발이 하는 날 이대원씨가 홍대 이마동미술대학장의 위임을 받아 가지고 와서 홍대 출강을 교섭했다.
얼마간 시간강사로 나가다 홍대 재단이사장 이도영씨의 특별부탁으로 68년부터 전임이 되었다. 나중에는 미술 학부장까지 맡아 본격적으로 후진을 양성했다.
홍대에 있을 동안 나는 조복순(동양화가)임완규(서양화가)씨 등과 가까이 지냈다. 조복순씨가 투망을 잘해서 늘봄농원 근처 냇가에 나가 천렵도 했다.
산기슭에 솥을 걸고 밥도 짓고 투망으로 민물고기를 잡아서 고추장을 풀어 끓여 먹었다.
70년인가 당국이 교수들은 출근해서 퇴근까지 대학에만 붙어있어야 한다는 새 근무규정이 나와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꼭 근무규정이 까다로와서라기보다는 내 그림을 그려야겠기에 일단 홍대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랬더니 조복순씨가 사표를 들고 와서 다시 나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도 끝내 나가지 않고 교수생활을 청산해버렸다.
내가 미국 가고 없는 사이에 제당이 홍대에 출강, 파문을 일으켰다.
홍대는 2학년담임에 천경자씨, 3학년 담임에 운보(김기창), 4학년 담임에 청전이 맡다가 운보가 수도여사대로 옮겨감에 따라 제당이 홍대로 오고 청전은 명예교수로 올라앉았다.
서울대에서 홍대로 적을 옮긴 제당이 홍대의 터줏대감 격인 천경자씨와 사이가 좋지 않아 문제가 되었었다.
이 불화가 67년 16회 국전에서 터졌다.
당시만 해도 국전을 좌지우지할이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던 제당이 채색화를 푸대접한 것이다.
이 결과로 천경자씨가 지도한 홍익대쪽 채색화 22점과 운보가 가르친 수도여사대쪽 채색화 15점이 무더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서로의 견해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자기류의 그림을 내세우고 자기 제자를 키우려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선자들은 국전이 열리고 있는 기간중인 10월12일부터 22일까지 덕수궁 중화문 옆 건물에서「제16회 국전 동양화 부 낙선 작품 전」을 열었다.
이영수 이경수 심경자 이석구 금영동 김준자 박예자 서홍원 유소정 이영자 이신우 신은숙 최은길 최송대 강신자 이종진 이화자 박상순 유영렬 양세자 김화연 노준보 황영자 홍용선 이승은 등 낙선자 전시회에 출품한 25명은 대통령에게도 청원서를 냈다.
이당(김은호)과 소정(변관식)은 전시작품을 돌아보고 차까지 사주면서 낙선작가를 격려했다.
당시 TBC는 모닝 쇼란 프로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다. TV프로에는 소정과 이영수 이경수씨가 출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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