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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여름을 얼려 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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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분홍신

▶ 가발

▶ 첼로

▶ 여고괴담4

일본 영화 '링'(1998년)은 현대 공포영화의 분기점이다. 귀신의 원한을 풀어줘도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정체 불명의 비디오를 본 사람들이 모두 1주일 만에 죽어나간다. 우발적 살인이 잇따르는 현대사회의 병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링'에서 시작된 일본 호러영화는 할리우드를 접수했다. 이른바 전자매체와 결합한 '머리 풀어헤친' 동양귀신이 서양인을 사로잡았다. '링''주온'이 잇따라 미국 옷으로 갈아입었고, 극장에서도 선전했다.

30일 개봉하는 공포영화 '분홍신'(감독 김용균)의 고민도 '링'을 넘어선 그 무언가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만든 청년필름 김광수 대표는 '링'의 코드를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단절된 소재로 안데르센 동화 '빨간 구두'를 주목했다. 저주가 내린 구두를 신은 어린 소녀가 멈추지 않는 춤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발목을 자른 것처럼 '분홍신'의 등장인물들도 특별한 연유 없이 하나 둘씩 발목이 잘려나간다.

'분홍신'에선 서른 살 엄마(김혜수)와 여섯 살 딸(박연아)이 팽팽한 긴장의 중심에 놓여 있다. 분홍신을 통해 잃었던 여성성을 되찾으려는 엄마와 신발의 힘을 빌려 좀 더 발레를 잘하고 싶은 딸의 욕망이 겹쳐진다. 엄마와 딸이 다투는 사이 욕실의 거울에는 피 묻은 신을 움켜쥔 한 소녀의 영상이 나타나고….

무덥다. 조금만 움직여도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더위에 늘어진 몸과 마음을 공포영화로 급속냉동시킬 계절이 다가왔다. 올 여름 한국 공포물은 '분홍신''가발''첼로' 등 일상의 사물을 공포의 매개체로 활용한 게 큰 특징. 엽기적 영상과 충격적 괴음으로 관객을 놀래는 '깜짝쇼' 대신 나사 조이듯 객석을 서서히 압박해가는 '드라마'를 강화했다.

'가발'(감독 원신연, 8월 12일 개봉)은 항암치료를 받아 머리카락이 빠진 동생(채민서)을 위해 언니(유선)가 가발을 선물하면서 시작한다. 가발을 쓰는 바로 그 순간, 밖에서 누가 당신을 응시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머리칼의 형태가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또 사람의 기억을 먹고 자란다는 설정이 섬뜩하다.

'여고괴담 4 '(최익환, 7월 15일)도 청각의 공포에 집중한다. 바람에 날아든 악보에 목이 베인 영언(김옥빈)이 선혈을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에서 시작해 복도의 발자국 소리, 보일러실의 기계음,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등이 공포를 극대화한다. '식스 센스''디 아더스'처럼 혼령이 '주연'을 맡은 점도 색다르다.

'첼로'(이우철, 8월 18일)는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같은 음악을 들은 한 가족이 모두 처참하게 죽는다는 내용. 첼로의 서글픈 선율이 공포를 배가한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올 한국 영화는 여성.학교.가족 등 일상 속의 공포를 건드리는 게 특징"이라고 밝혔다.

최근 공포영화로 주목받는 국가로는 태국이 있다. 각막수술을 소재로 한 '디 아이'(2002년)를 내놓았던 태국은 올해 '셔터'(팜푹 웡품, 30일)로 한국 관객과 만난다. 카메라 셔터에 잡힌 원혼, 잇따른 연쇄 자살을 소재로 한 정통 호러물이다. 미디어(카메라)와 귀신이 만나고, 원한을 푼 혼령이 여전히 지상을 배회하며, 관객의 허를 찌르는 충격 영상 등이 '링'의 흥행 요소를 충실히 계승한 듯하다.

반면 할리우드는 여전히 리메이크 열풍이다. 그만큼 소재의 한계를 느낀 걸까. 사지가 절단되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에 이어 1979년 선보였던 '아미티빌 호러'(앤드루 더글러스, 7월 1일)도 새롭게 각색됐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세계 공포영화는 당분간 동양식 원귀가 이끌 것"으로 점쳤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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