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펠트와 조선개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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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아시아대륙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반도국이기 때문에 항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침략위협을 받아왔다. 그러기에 19세기 후반기 한국을 가리켜 「나봇 포도원」(구약성서「열왕기」) 이라 하지 않았던가. 즉「아합」같은 제국주의 열강이 제각기 한국의 「나봇포도원」을 삼키려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우리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취할 외교노선은 결국 대중사대교린 외교에 그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조선왕조시대 외교라면 대중조공무역, 일본에의 통신사왕래가 그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청 국이 1844년에, 일본이 1854년에 각각 개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조선왕국만은 사교(천주교)에 물들지 않는다면서, 스스로 동방예의의 순결성을 고수함으로써 외부세계와 단절된 쇄국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었다.
은둔왕국의 문을 처음으로 두드린 자가 미국이었고, 이 문호를 활짝 열어 서구문명의 빛을 쐬게 한 이가「슈펠트」제독이니, 그는 일찌기 1867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탐문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바 있었는데, 이때「슈펠트」는 조선개항의 꿈을 펼치게 되었다. 미국의 통상무역의 범위를 한반도로 확장해서, 교역을 증진하고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며, 조선의 개화를 도와줌으로써 근대화시키려는 것이 그의 근본 목적이었다.
「슈펠트」의 조선개항정신은 바로 서구열강 특히 러시아에 의한 한반도 지배를 막고, 한반도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조선의 주권자주독립국가로서의「국가적 개체」를 인정하는 한편, 은둔 왕국을 문화적으로 근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스와타라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에 와서 역사적인 한미조약체결을 앞두고,「슈펠트」는 조선대표에게 『이제 이 나라(조선)를 본즉 산천이 수려하고 인물이 순후하니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몇 년 안 가서 세계에 그 이름을 드러낼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조선의 총명한 청년을 미국에 유학 보내서 어학과 근대문명을 익힌다면 근대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을 개항시킨「페리」제독을 역사적 위인으로 찬양하면서 조선개항을 성취한「슈펠트」제독을 평범한 해군인사로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리」는 일본근대화의 길을 열어주었으나 「슈펠트」의 조선개항은 곧 왕조의 멸망으로 끝장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의 개항 정신을 두고 볼 때 우리는「페리」보다「슈펠트」의 위업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슈펠트」는 조선개항을 위해 일본·한국·중국을 왕래하면서 이홍장의 속방 정책을 배제하고, 한국의 완전자주독립국가를 인정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한미조약을 체결했으니, 이것은 중·일이 구미 여러 나라와 체결한 조약보다는 훨씬 불평등성이 배제된 조약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슈펠트」의 승고한 조선개항 정신을 이어받아 근대화를 구현하지 못하고 왕조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김원모<단국대교수·미국 사>
▲1934년 경북안동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 ▲미국 포틀랜드 주립대 수학 ▲문학박사 ▲저서『근대 한미 교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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