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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합의 20년 … 북핵 외교는 실패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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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논설위원

『역사의 대하』는 1993~94년 북핵 1차 위기를 다룬 북한의 다큐멘터리성 소설이다. 김정일이 실명으로 나오는 대미 외교 승전보(勝戰譜)다. 주인공은 문선규로 가명 처리된 강석주(현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 외교부 제1부부장이다. 미국의 카운터파트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를 상대로 한 교섭 과정이 생생하다. 두 사람 간 북핵 동결과 보상의 제네바 합의 20년을 맞아 이 소설 속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눈덩이는 굴릴수록 커지는 법”이라고 강석주가 갈루치에게 건넨 한마디다. 그 불길한 말이 지금 현실이 됐다.

 북핵은 너무 커졌다. 물심(物心)양면이다. 지난해 북한 보유 추정 핵무기는 10~30기다(밀리터리 밸런스). 2016년엔 최대 48기에 이를 것이란 추산도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제도화했다. 2년 전 개정 헌법 서문에 ‘핵보유국’ 네 글자를 넣었다. 지난해는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채택하고 핵무기 보유 강화와 사용에 관한 법을 만들었다. 북한 군부의 배짱도 커졌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최근 1~2년 잦은 재래식 위협과 도발의 근저엔 핵능력에 대한 과신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북핵 피로 현상이 만연하다. 북한과 국제사회의 ‘중대 불일치’ 속에서 북핵은 덩치를 불리고 있다.

 북한 핵능력 증대는 두 가지의 산물이다. 하나는 북한의 핵에 대한 물신(物神) 숭배다. 북한은 핵의 양면인 원자력과 무기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다. 남북 간 명암은 여기에서 갈렸다. 남쪽의 산업 입국 원동력은 원자력이다. 북한은 자기들 표현대로 보검(寶劍)을 쥐었지만 제재를 안고 살았다. 경제로 보면 잃어버린 20년이었다. 그럼에도 북은 핵무장의 길을 갔다. 첫째는 체제 안보다.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 체제 종말은 북에 산 교훈이었다. 내부적으로 핵은 김일성 3대의 절대 권위 보조물이다. 대남 관계에선 재래식 전력(戰力) 열세를 만회해주는 카드다. “핵무기 포기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는 북한 얘기는 또 다른 현실이다.

 관계국의 외교 실패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은 독특한 환경에서 핵에 도전했다. 미국은 최초 핵 보유국이다. 러시아는 미국에 필적하는 두 번째 핵보유국이다. 중국은 미·러 핵 독점 체제를 깼다. 일본은 최초 피폭국이고, 한국은 미국에 의해 핵개발이 좌절됐다. 한·일은 미 핵우산에 들어 있다. 북한은 뒤늦게 이 핵 게임에 뛰어들었다. 핵개발 명분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다. 예나 지금이나 같다. 북핵 외교는 2002년 강석주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시인 때 일대 분수령을 맞았다. 당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수정·보완되지 않고 깨지면서 북핵 제동 장치가 없어졌다. 관계국의 대북 봉쇄와 관여, 대화와 압박, 인센티브 제공과 제재도 소용이 없었다. 그 새 6자회담은 죽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인내로 끌날지 모를 상황이다. 북한은 자력갱생 경제다. 세계 경제와 얽힌 이란이 아니다. 중국 역할론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국은 북핵보다 북한 붕괴를 더 반대한다.

 그렇다고 북핵 불용(不容), 북한 비핵화를 포기할 순 없다. 한반도에 대한 국제사회 개입이 상존화하고 안보 딜레마는 갈수록 커진다. 이제 우리가 북핵 해결로 가는 새로운 틀을 주도할 때가 왔다. 전제는 북이 쉽사리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 인식이다. 단계적이고도 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 북핵 동결은 현실적 출발점이다. 미 핵물리학자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의 3개 노(No) 목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이상의 핵무기는 안 된다(No more bombs)가 첫째다. 플루토늄과 HEU 생산 동결로 이뤄지는 목표다. 더 좋은 무기는 안 된다(No better bombs)가 다음이다.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중지를 해야 한다. 마지막은 수출 중지다.

 우리 입장에선 북핵 해결 진전 과정을 반드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접목시켜야 한다. 마침 남북 간에는 처음으로 최고 권력기관(청와대·국방위원회) 간 채널이 갖춰졌다.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창(窓)이다. 지난 20년의 북핵 외교에서 최대 교훈은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 북한 편이었다는 점일지 모른다. 초기 목표의 눈높이를 낮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오영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