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8)『국가재건최고회의』(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월19일 발족되기는 했으나 그 설치근거가 마련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6월6일이다.
최고회의는 이날 최고회의의 법적지위와 설치근거를 규정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통과시키면서 경과조치로 『현재의 최고위원은 이 법에 의해 선임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다.
4장 24조 부칙으로 된 이 법은 『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 과업완수 후에 시행될 총선거에 의하여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최고통치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고 지위를 규정했다.
혁명주체들은 거사가 성공된 이후의 군정실시에 대비하여 오래 전부터 이같은 방법을 구상했었던 것 같다.
이같은 사실은 군사혁명위원회가 최고회의로 명칭이 바뀌기 직전인 5월19일 상오에 있었던 장도영의장의 기자회견내용으로만 봐도 뒷받침이 된다.

<거사 전 미리 구상>
장 의장은 박정희 부의장이 동석한 가운데 가진 기자회견에서 『혁명정부의 형태는 어떻게 되며 군정방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명칭은 어떻게 변경될지 모르지만 군사혁명위원회가 최고권력기관이 되며 그 밑에 현존하는 사법기관이 있고 행정부를 새로 조직한다』고 답변했다.
다음은 최고회의시절 입법·행정업무를 맡았던 L씨(전 감사원장)의 증언. 『혁명 전부터 나는 거사성공 후 추진할 정책·통치형태 등에 대해 보따리를 싸들고 다니며 준비를 했어요. 나이도 젊은데다가 숨어 다니며 하는 일이라 여간 힘들지 않았읍니다. 박 소장은 워낙 바쁜 몸이라 나와 김종필 중령이 주도했읍니다. 최고회의를 최고의 통치기관답게 하려니까 이를 뒷받침할 근거법의 제정이 필요했읍니다. 그래서 거사 전부터 수집해온 자료와 당시의 정부조직법, 국회법을 근간으로 조치법을 초안했읍니다. 말이 참고지 사실 새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유원식씨(전 최고위원·대령)도 증언을 통해 사전준비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다음은 유씨의 증언내용.
『국가비상조치법은 혁명 전에 이미 구상을 완료해놓은 법입니다. 이것을 5·16직후 헌법기초위원들이 구체화시킨 것이지요. 헌법기초위원은 나, 이석제씨, 손창규씨 등 5명이었죠. 국가비상조치법은 「기존헌법의 일부를 정지시키고 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장악한다」로 돼있었지요.
이 법안을 자문위원 유진오씨·한태연씨 등에게 심사를 의뢰했죠.
헌법을 대신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적 체계나 자구 등에 지적사항이 있어서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어서 말예요. 그런데 최고회의에서 의결되는 날 한바탕 말썽이 있었어요.
한태연씨가 법조문의 일부를 수정하고 나온 거예요. 그는 의결에 앞서 <이 법이 통과되면 여러분들은 국회의원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됩니다>고 서두를 꺼냈읍니다.
3권을 장악하는 최고회의 기능을 입법부의 기능만으로 격하시키는 발언이었죠. 일부의원들이 책상을 치며 일어섰읍니다.

<우리는 총 들고 국회의원을 내쫓았다. 그런데 만약 사법부와 행정부가 그대로 살아있다면 경찰이 최고위원들을 반란죄로 잡으러 올 것이고 최고회의기능은 약화되어 혁명과업은 수행할 수 없다>가 반대 이유였읍니다.
옥신각신 입씨름이 붙자 박 소장이 휴회를 선언했죠. 이날 하오에 회의는 속개됐고 국가비상조치법은 원안대로 결국 통과됐읍니다.』
그러나 당시 최고회의의 입법과정에 깊숙이 간여했던 한태연씨의 말을 들어보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사건에 마련된 것 같은 감은 들지 않는다. 한씨로부터 입법경위를 들어보자.
『5·16이 일어난 지 1주일도 채 안 된 때로 기억됩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신문사의 논설위원실로 이석제 중령이 권총을 허리에 찬 채 들어왔어요. 이 중령과는 내가 법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부터 몇 번 찾아와서 시국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 안면이 있었던 사이였죠.

<한태연씨 등 참여>
이 중령은 나에게 <혁명헌법을 만들어야겠는데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즉석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헌법은 국민전체의사에 의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이어 나는 <그러나 혁명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잠정헌법은 만들어 줄 수가 있다>고 말했지요.
결국 이 중령의 요청에 의해 그때부터 회현동에 있던 신민 호텔에 방을 하나 빌었읍니다. 혼자 1주일을 꼬박 작업했읍니다. 주로 「나치」시대의 수권법을 많이 참조했읍니다. 법안을 만든 후 당시 법률자문을 맡고 있던 유진오씨에게 보였죠. 유씨도 별 이의를 달지 않았읍니다.
5·16자체가 기본질서는 그대로 놔두고 정권의 교체만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비상조치법과 저촉되는 범위 안에서만 헌법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도록 하고 기타 사항은 당시 헌법을 그대로 준용토록 한 것이 특색이었죠.』
아뭏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난산이었다. 당시 최고회의의장 고문역을 했던 H씨는 『당시 자문에 응하던 법률가들은 정치적인 문제를 법체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소화하려했기 때문에 최고위원들의 심한 면박을 받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최고회의는 이어 6월9일 최고회의의 운영·기구 등을 규정한 「최고회의법」을 통과시켜 법적 체제를 완비했다.
최고 회의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최고회의는 각 부문별로 14개의 분과로 나누어 ▲행정 오치성 ▲내무 박원빈 ▲외무-국방 유양수 ▲재무 문재준 ▲법무 이석제 ▲문교 손창규 ▲건설 김진위 ▲농림 정세웅 ▲상공 유원식 ▲보사 길재호 ▲교통 김윤근 ▲체신 옥창호 ▲공보 송찬호 ▲공안 한웅진 준장 등이 각각 담당했었다.
또 국가정책을 연구케 할 목적으로 최고회의기획 위원회를 설치하고 기획위원회산하에 ▲정치 ▲경제 ▲사회-문화 ▲재건-기획 ▲법률 등 5개의 분과위원회를 두어 위원장(현역대령)을 포함한 7∼10명의 분과위원을 두었다.
분과위원은 주로 학계·관계 및 관계전문가중에서 임명했고 민병태 박관숙 성창환 김준엽 서돈각 신태환씨 등 당시 일류대학의 교수 6명을 의장고문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고 회의법이 통과되면서 14개 분과위원회는 ▲법제사법 ▲내무 ▲외무-국방 ▲재정-경제 ▲교통-체신 ▲문교-사회 ▲운영 등 7개 위원회로 통폐합되고 이 7개 위원회의 위원장과 최고회의부의장으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에서 사실상 거의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박정희 부의장을 위원장으로 ▲이석제법사 ▲오치성 내무 ▲유양수 외무-국방 ▲이주일 재경 ▲김윤근 교체 ▲송찬호 문사 ▲김동하 운영위원장을 위원으로 하여 8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가 「소최고회의」의 기능을 맡게 된다.
내각을 지휘·감독하게 되어있는 최고회의는 7인의 각 분과위원장에게 소관부처의 업무를 소상히 파악토록 하고 중요업무에 대해서는 사전에 관계장관의 보고를 받도록 함으로써 거의 매일 상임위가 열리다시피 했다.
따라서 상임위원이 아닌 다른 최고위원들, 특히 각 군 참모총장이나 다른 군직을 겸직하고 있는 최고위원들은 돌아가는 실정을 상세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시 최고회의에 근무하면서 운영상황을 실제 목격했던 L모씨의 증언. 『최고회의 전체회의에 회부할 중요안건은 항상 박 부의장과 분과위원장 및 김종필씨 등이 사전 협의하여 올렸죠. 매일 본회의가 10시에 열리는데 전날 하오에야 야전군사령관인 박림항 최고위원에게 연락을 하게됩니다. 부랴부랴 서울로 오지만 회의내용을 모르는 거예요. 회의자료가 수북히 의석에 쌓여있지만 그걸 언제다 읽습니까. 그래서 박 중장은 회의 때마다 <머리 수를 채우려고 날 불렀느냐>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읍니다. 최고위원이 30여명에 달했지만 회의에서의 발언은 대개 하는 사람이 단골로 했고 당연직 위원들은 거의 발언이 없었읍니다.』

<장 의장 거의 불참>
혁명초기(61년7월2일까지)엔 박정희 소장이 부의장이었지만 이 때도 장도영 의장은 거의 참석을 안했고 주로 박 소장이 최고회의를 주도해나갔다.
다음은 L씨 (당시 최고회의 근무)의 증언 계속.
『초기부터 모든 회의는 박 소장이 주재했읍니다. 장 의장이 가끔 참석해서 회의를 진행한 때도 있지만 마치 남의 일을 봐주는 듯한 표정이었죠.
회의분위기는 항상 긴장감이 돌았고 때로는 최고위원들간에 격론도 많이 벌였읍니다. 회의장에 처음엔 모두 권총을 휴대하고 참석했지만 6월초 비상조치법을 통과시킬 때 험악한 분위기를 겪고 나서는 반드시 입장하기 전에 권총은 풀어놓고 들어가도록 했죠.
최고위원중 한웅진·유양수·손창규 위원이 비교적 소신 것 발언을 하는 편이었고 유원식·이석제·오치성 위원이 발언을 자주 하는 편에 속했읍니다.
의견이 양분되어 격론을 벌일 때는 박 소장이 대개 캐스팅보트를 쥐었죠.
박 소장은 미동도 않은 채 줄담배를 피우다가 토론이 대충 끝나면 자신의 의견을 말했고 대개의 경우는 모두 이에 따랐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표결방법은 대부분 거수투표였으나·김종오 장군의 참모총장 임명 때만은 비밀투표를 했는데 반대는 만1명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박 소장은 최고회의에서 의결된 내용이 공포되기 전에는 보안에 무척 신경을 썼어요. 그는 두번이나 회의석상에서 <우리끼리만 한 얘기가 어떻게 밖으로 새어나가 24시간도 못돼 내 귀에 다시 들어오느냐>며 노발대발했어요.』
최고위원은 중령에서 중장에 이르기까지 계급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회의장에서의 발언이나 의결 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특히 최고회의법에는 의장·부의장이 유고시에는 최연소의원이 의장직을 대행한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퍽 이색적이었다.
이같은 규정이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 최고 회의법 제정에 깊이 간여했던 L씨(전 감사원장)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군의 계급에 익숙했던 일부 장성들이 혁명 초 영관급 최고위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할까하여 이를 막기 위해 터키헌법에 있는 이 최연소자의 승계조합을 넣었읍니다. 최고위원의 권한은 계급과 관계없이 동일한 것으로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죠.
당시 최연소위원이었던 오정한 위원이 의장직을 대행했던 일이 딱 한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고회의는 이같은 운영방식을 장도영 의장이 물려나는 이해 7월초까지 그대로 계속했다.
하지만 실상 최고회의의 초기 업무는 통상의 국정과 입법이었다. 혁명과업으로 성격 지어진 일들은 최고회의와는 다른 별도의 곳에서 기획되고 처리되었다. 최고위원들이 그런 중요업무가 수행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은 박 부의장의 메모로써였다.
박 부의장은 매일 메모로 그날의 중요처리사항을 제시해 통보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이 메모에 근거해 수행돼 나갔다. 그래서 초기의 일 처리들은 자신의 소관업무 외에는 살필 겨를도 없었지만 알지도 못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