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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우리 안의 어린 아이 돌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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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10년 넘게 책상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24색 색연필을 최근 꺼냈다. 호기심에 구입한 색칠공부 책에 색을 입혀보기로 한 거다. ‘색칠공부’라는 학업 지상주의스러운 이름 대신 요즘엔 ‘컬러링북’이라 부른다고 한다. 『비밀의 정원』이란 책이 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기에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인가 했더니, 요즘 잘나가는 컬러링북이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이 책을 사는 사람들의 72.3%가 놀랍게도 20~30대 여성이다.

 책을 펼치니 세밀하게 그려진 꽃과 나비와 부엉이가 기다리고 있다. 자, 무슨 색으로 칠해볼까. 빨간 색연필을 먼저 집어 들었는데 꽃잎 한 장의 면적이 너무 작아 칠하기 쉽지 않다. 집중 또 집중. 한 페이지의 반도 못 칠했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안티 스트레스, 잡념 타파, 심리 치유 등의 효과가 있다더니 그런 것도 같다. 완성본을 보니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칭찬 받은 기억도 솔솔 떠오르며, 화가가 될 걸 그랬나.

 ‘어른스럽지 않은 짓’이 유행인가보다. 주변에는 레고블록이나 나노블록에 빠져 있거나 피규어, 장난감을 모으는 어른들이 수두룩하다. 친구 하나는 서른 넘어 ‘마론인형’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너무 갖고 싶었는데 엄마가 사주지 않아 쌓인 ‘한’을 풀기 위해서라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어린 아이’와 화해하는 중이라고 했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도 슬럼프에 빠진 어느 날 자기 내면의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 블록을 쌓으며 영감을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주말, 서울 석촌호수에 뜬 노란 오리 ‘러버덕’을 보러 온 어른들의 표정이 정말 어린 아이처럼 맑고 순수해 놀랐다. 그냥 물에 둥둥 뜬 커다란 오리 인형일 뿐인데 저렇게 즐거워하다니. 몸은 어른이나 우리의 내면에는 계산 없이 기뻐하고 장난치고 사랑하고픈 어린 아이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준 장면이었다. 귀여운 것에 감탄하는 행위는 인간의 불안감을 없애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는 일본 히로시마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도 있다.

 문제는 내면의 어린 아이를 돌보는 데도 돈이 든다는 사실. 장난감이나 인형을 모으다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여럿이다. 색칠공부를 시작한 나 역시 다른 이들이 블로그에 올린 멋진 결과물을 보며 점점 욕심이 커진다. ‘내 그림의 완성도가 낮은 건 연장 탓’이라며 72색 색연필을 살까, 수채물감을 살까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날락하는 중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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