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에 빠져 헤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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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4년에 들어와 유럽전선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날 것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아시아지역에서 일본이 더 버틸 것만 같았다. 따라서 나의 감옥생활도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탈출계획을 세웠다.
탈출은 아주 손쉬웠다. 나는 한 친구에게 조그마한 오스틴승용차 한 대를 병원의 의사전용 주차장에 주차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오스틴승용차라야 단돈 50이집트파운드면 영국군잉여품 처리장에서 살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병원정문을 통해 유유히 걸어 나왔다.
모든 일이란 한쪽이 좋으면 다른쪽이 나쁘게 마련이다. 나의 탈출은 영국에 대한 승리였지만 나를 몰래 빠져나가게 한 감시병에게는 안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으며 그를 잊지 못했다. 혁명후 나는 그를 찾았지만 벌써 그는 축은 뒤였다.
탈출후 나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나는 가난했으며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그러나 겨우 얻은 일자리란 화물트럭에 짐 싣는 일이었다.
나는 갈라비아(아랍국가의 저소득층이 입는 잠옷 비슷한 흰옷)옷차림에 수염을 길렀으며 이름도 「알·하지·모하메드·누르·엘·딘」이라고 바꿨다.
44년12월 어느 날 이었다. 시멘트를 싣고 카이로에서 델터지방으로 가고 있었는데 3일간 계속 비가 내렸다.
이런 경우란 이집트에서 전례없던 일이었다.
우리는 진구렁텅이에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나는 이질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고생이 더했다. 담로라는 작은 마을 어귀에서 한 트럭운전사를 만났는데 그는 우리를 방이 하나밖에 없는 그의 집에 묵게 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기부인을 친척집에 보냈다.
나는 설사로 무척 고생했으며 건강이 아주 나빠진 것 같았다. 그 트럭운전사와 그의 부인은 내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보살펴 주었다. 그는 나에게 이집트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솔직함과 인내심 그리고 가족유대를….
내가 좀 나아지자 그들은 나의 이름을 물었다. 나는 「알·하지·모하메드·누르·엘·딘」(「하지」는 메카로 성지순례를한 회교도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두르실 것 없답니다. 세상이 없어지나요. 앉아요. 메카로 성지순례한 이야기나 들려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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