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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공자(孔子)와 은행나무

중앙일보

입력

은행나무 계절

가을은 은행나무의 계절이다. 은행나무는 지구에서 1억5천만 년 전에 터 잡은 식물로 수종이나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45억 년 전에 지구가 생성되었고 다시 10억 년 전에 생명체가 살 수 있었다고 하며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이 불과 수천만 년 전이라고 할 때 은행나무는 인류에 비해 대단히 고참인 셈이다. 찰스 다윈은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알 것 같다.

은행나무의 원산지가 중국인데 중국에서는 은행이라는 말 보다 오리발 나무(鴨脚樹)라고 많이 부른다. 은행잎의 모양이 오리 발과 닮아서라고 한다.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부르는데 은행이 열매를 맺는데 20년은 걸려야 하기에 할아버지(公)가 심어야 손자가 거둔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은행(銀杏)은 그 씨가 살구 씨와 비슷하지만 은색을 띄고 있어서 은행이라고 한다.

공자의 행단

은행나무는 중국의 성인 공자(孔子 BC 551-479)를 연상케 한다. 공자가 고향에서 은행나무 아래 그늘에서 단(壇)을 만들고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공자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른다. 공자와 관련되는 교육기관에는 모두 은행나무를 심는 것도 행단과 관련된다. 과거 조선왕조의 국가 교육기관인 성균관에는 늘 은행나무를 심었고 지방의 향교에도 은행나무가 빠지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성균관대학 교정에 있는 명륜당(明倫堂)의 500년 된 은행나무 네 그루가 장관(壯觀)을 이룬다. 은행나무가 그들보다 수천만 년 후에 지구에 살게 된 인류 중 공자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은행나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균관대학의 배지(휘장)에 은행잎 도안이 있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일본의 국립대학 1호 도쿄대학도 은행잎을 학교 배지로 사용한다. 도쿄대학은 본래 일본의 성균관이 있던 장소에서 근대적인 대학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도쿄대학이 있는 우에노(上野)에는 에도(江戶)시대부터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에도시대의 유학자들은 공자를 존경하여 이곳을 공자가 태어 난 창평향(昌平鄕)(곡부의 옛 이름)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의 국립대학 1호인 서울대학은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은행나무와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만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지 않고 스스로 국립대학을 설립했다면 지금의 성균관자리를 중심으로 대학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랬다면 유학(儒學)의 선배인 우리가 일본 보다 먼저 은행잎을 학교 상징으로 사용했는지 모른다.

공자의 가르침의 상징이 된 은행나무는 유교(儒敎)와 함께 한반도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는 공자의 사상과 함께 수많은 은행나무가 자란다. 수백 년 그리고 천년 이상 된 은행나무도 가을이 되면 샛노란 칼라에다 아름다운 선형미(線形美)를 자랑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한다.

노국대장공주와 창원 공씨

우리나라에는 은행나무와 함께 공자의 후손들도 많이 살고 있다. 공자의 후손이 한반도에 처음 온 때는 고려 공민왕의 귀국과 관련된다. 고려 충숙왕의 아들인 공민왕은 왕자 시절 인질로 원(元)의 수도 대도(북경)에 살았다. 공민왕은 1349년 대도에서 원의 황족 위(魏)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하였다. 원은 칙령으로 고려의 충정왕을 폐위하자 공민왕은 부인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1351년 귀국하였다. 노국(魯國)은 공자의 고향이 있는 곳으로 노국대장공주의 어머니가 공자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원나라의 한림학사로 공자의 54대손 공소가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여 한반도에 따라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국대장공주와 공소는 원의 쇠퇴를 이미 알고 공민왕이 부원파(附元派)를 제거하는 개혁정책을 지지한다. 공민왕은 정치적 후원자인 노국대장공주를 사랑하고, 공소를 중용하여 창원지역을 영지(領地)로 하는 창원백(昌原伯)에 봉했다. 이로서 공소가 창원 공씨의 시조가 된다. 공소는 지난 7월4일 방한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국가 주석이 서울대 연설에서 언급한 인물이다. 공소는 중국을 떠날 때 이름은 소(昭)였으나 고려에 와서는 소(紹)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고려 광종의 이름 소(昭)를 피하기(避諱) 위해서였다.

공소의 아들 공여의 두 아들은 고려 멸망과 함께 길을 달리한다. 큰 아들 공부(어촌)는 친 이성계로 그의 후손이 조선왕조에도 벼슬을 많이 하나 둘째 아들 공은(고산)은 반이성계로 조선왕조 때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조선조 역대 국왕 중 정조(正祖)는 공자를 존경하여 조선에 사는 공자후손을 우대하고 그들의 본관 곡부(曲阜)를 찾아 주었다. 창원 공씨가 왕명에 의해 처음으로 곡부 공씨가 되어 공자의 후손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정조는 중종 때의 문신으로 공자 64대손인 공서린이 고향에서 은행나무를 심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을 궐리(闕里) 라고 고쳐 부르게 하고 그 곳에 “궐리사”라는 사당을 지어 공자의 영정을 모시도록 하였다. 오산 궐리사의 유래이다. 본래 공자는 곡부(수나라 때부터 사용)의 옛 이름인 창평현 추(鄒)읍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숙량흘이 3살 때 죽자 어머니 안(顔)씨는 공자를 데리고 궐리로 이사를 하여 공자를 키워냈다. 궐리는 공자가 자란 곳이다.

공자의 고향 산동성 곡부시는 인구 64만중 13만정도가 공씨이다. 인구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공자의 후손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가 공자족보인데 5년 전에 편찬된 글로벌 족보는 모두 80책으로 4만3천 페이지에 이른다고 한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공자 후손 200만 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중국이외에 공자의 후손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한국이라고 한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공자의 후손들은 가장 모범적인 생활을 하여 곳곳에서 존경받는 시민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공자 브랜드와 공자학원

중국이 경제발전으로 배금주의가 만연되고 있는 이때 중국인을 교육시키는 인물로 공자만한 인물이 없다고 한다. 중국정부는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국민의 정신적 안정을 찾는데 공자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더구나 해외에서도 공자 브랜드를 활용 중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얻게 하는 공공외교 (public diplomacy) 수단으로 공자를 활용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최근 이러한 사정을 감안 2004년 처음 설립된 공자학원을 높이 평가하고 세계 각지에 설립된 공자학원을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인 모두의 것으로 강조하고 공자 탄신일(9.28) 하루 앞날인 9월27일을 처음으로 “공자학원의 날”로 지정하였다.

금년은 공자학원 설립의 1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세계에서 공자학원 제1호로 설립된 “서울공자학원”을 비롯하여 지난 10년간 128개국에 468개의 공자학원이 설립되었고 공자학원에 등록된 학생 수는 100만 명에, 교사 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만일 중국에서 “마오쩌둥학원” “덩샤오핑학원”이라고 명명하였으면 이러한 초고속 성장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세계인들은 중국의 성인(聖人) 공자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의 빛과 그림자

은행나무의 계절에 서울의 가로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전국의 가로수 약 40%가 은행나무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역시 공자의 나라답게 가로수마저 은행나무로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환경 전문가들은 은행나무 가로수와 공자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여름에는 녹색으로 태양열을 흡수하면서 그늘을 주고 가을에는 노란색으로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면서 서울 시민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병충해에 잘 걸리지 않는 은행나무는 그 무성한 잎으로 대기 유해가스를 흡수하여 대기정화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이맘때 길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은행 알은 행인들의 발길에 짓밟혀 악취를 풍기면서 인도를 더럽히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은행 알이 혈액 순환에 좋고 기침을 막아주는 기관지염에 좋다고 하여 금방 금방 회수될 것 같지만 대기 오염에 찌든 도시의 가로수 은행 알은 버림을 받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관에서는 은행나무의 암수 조절 등 불편 해소 대책을 강구하는 것 같다. 은행나무의 빛과 그림자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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