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학업·운동 함께 할 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남자농구의 국가대표로 뛰어난 활약을 했던 김인건(현 삼성감독)은 경북고를 나온 후 62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고교 때부터 발군의 플레이어였던 김인건은 요즈음 같이 특기자 혜택을 받고 진학한 것이 아니다. 김인건은 대학에서도 일반학생과 같이 면학에 힘썼으며 졸업성적이 평균 B학점이었다.
열차사고로 세상을 떠난 60년대 남자농구 대표팀의 주장이자 명 센터였던 김영일은 60년에 경기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정 외과에 들어갔다. 김영일은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선수생활을 시작했고 대 스타가 되었다.
한국농구가 낳은 최대의 명기(명기)인 김영기(현 신용보증기금부장)는 50년대 말 고려대 법과를 다녔다. 끊임없는 국내의 대회에 출전하면서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던 김영기 이지만 기업은행에서 누구보다 빨리 승진했고 신용보증기금이 창설되자 스카우트 돼 갔다.
이 회사의 창설초기에 당초 자기소관 업무가 아닌데도 유창한 영어로 외국인 내방객과의 상담을 처리해낸 일은 유명한 일화다.
김영기는『대학공부를 정상적으로 한 덕분』이라고 말한다.
60년대 말 1급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변재혁(미국이민)은 고려대 시절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한일은행에 들어가 여전히 야구를 하는 가운데서도 출중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경남고를 거쳐 상은에 갔다가 고려대에 진학한 야구의 허구연은 국가대표 2루수까지 했지만 석사학위까지 받는 가장 뛰어난 학도였다.
그는 고려대 시절에 성적이 모두 B학점 이상이어서 공부와 운동을 겸할 수 있다는 본보기 선수였다.
여자농구의 기수 박신자(현 신용보증기금 감독)를 보자. 숙명여고를 나와 상업은행 팀에서 활약했지만 동시에 숙명여대 영문과를 다녔다. 박신자는 이화여대 대학원에도 다녔고 현역은퇴 후 이지만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원에서도 석사학위를 땄다.
이러한 김영기·김영일·김인건·박신자·허구연 등 대학시절 면학에 힘쓴 선수들이 한결 같이 현재 소수의 가장 양식 있는 체육인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특히 70년대 이후 대부분의 대학은 선수를 한낱 대회출전용의 특수기능 생으로 여길 뿐이지 소정의 학과목을 수강토록 하고 학점의 의미를 인식시키는 배려를 전혀 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결국 졸업을 보장해주는 댓가로 운동으로 학교를 위해 봉사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대학의 체육학과가 본래의 뜻대로 체육학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고「운동과」로 변질, 전락된 느낌이다.
운동선수에 대한 고교교육의 파행상에 장단을 맞춰 대학마저 팔·다리·몸통만 있고「두뇌」가 없는「불완전한 체육인」을 양산하고 있는 현실성은 발전을 기약할 수 없는 한국스포츠의 장래를 통곡케 하는 것이다. 정부의 체육정책과 태학의 교육자세가 모두 하루빨리 반성해야 한다.
76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축구선수 송병덕(현 외환은)은 2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탁월한 명 수비였으나 학업에 더 열심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됐다. 초년 대 이후 공부하는 대학선수로서 희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청소년축구 대표선수였으며 고려대의 주전 윙플레이어인 김석원은 미국이민을 앞두고 틈틈이 노력한 보람으로 웬만한 영어회화쯤은 해낸다. 그래서「신기한 축구선수」라는 말을 듣고있다.
그러나 김석욱 케이스는 어떤 선수라도 뜻을 가지고 노력하면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양대 축구부가 재작년 영어특강을, 또 중앙대 야구부가 천자문 공부를 잠시 시도한 적이 있다. 최소한 이런 노력이라도 각 대학에 널리 확산돼야 할 것이다.
서울대(사대) 축구팀은 강의와 시험에 추호의 특혜를 받지 않고도 작년 대학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팀에서 자란 강신우는 충무선수를 거쳐 화랑선수로까지 발전했다. <박군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