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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9)<제76화>화맥인맥(48)「부역자 심사」|월전 장우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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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괴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매일같이 회의한다고 사람들을 불러내 강제노동을 시켰다.
양식이 없어 안사람이 나서서 포도장사를 했다. 동성학교 밑 포도밭에서 광주리로 포도를 받아다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팔았다.
이런 판에 우리 집에 노력동원령이 떨어져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나갈 수도 없는 터여서 이 일마저 내자가 맡아야 했다.
막장에 나가 마포 쪽에서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로 쓰일 모래가마를 만들었다.
9월 초순이 되자 서울 상공에 제트기가 나타나 맷돌 가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제트기만 뜨면 남산 고사포 진지에서 일제히 대공사격을 하곤 했다. 쌕쌔기란 이름을 가진 제트기가 저공비행, 고사포 진지를 때렸다.
나는 집에서 제트기가 폭탄 떨어뜨리는 걸 육안으로 목격했다.
UN군이 인천 상륙하던 날은 나는 삽을 가지고 푸성귀라도 가꿀 양으로 마땅한 쪽을 파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승전보는 다소 안도감을 주었지만 시가전이 걱정이었다.
벌써 이대 뒷산에서는 UN군과 인민군이 엎치락뒤치락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었다.
27일인가 서울역 근처서 화광이 충천하고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인민군의 행패가 시작되었다.
동성중학 강당에 군수품을 쌓아 놓고 도망가느라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포도덩굴 밑에 잠복해 있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금세 제트기가 날아와 포도밭을 한바탕 갈겼다.
우리식구는 시가전에 대비, 방의 다다미를 모두 빼서 동서남북으로 세우고 그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한참 숨을 죽이고 있는데 지축을 흔드는 우렁우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났다 싶어 애들을 꽉 껴안고 동정을 살폈다.
앞집 사는 박 노인이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며『뭘 하고 있노, 국군이 들어왔댕…』하고 알려줬다.
좋아서 쫓아나가 보았더니 국군과 유엔군이 종로 5가 쪽에서 혜화동을 향해 어느새 서울대앞길을 메우고 있었다.
길 한복판은 비워놓고 양쪽가로 일렬종대로 늘어서 들어왔다.
시민들은 어디다 감추어 두었는지 손에 손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다. 물을 퍼다주는 사람, 얼싸안고 우는 사람으로 혜화동 로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는데도 이따금 총포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서울수복 얼마 후에 춘곡(고희동)댁에서 부역자 심사위원회가 열렸다.
춘곡·설초(이종우)·청구(이마동)·이순석씨 등 도강파들이 의기양양해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장인 춘곡 댁에는 춘곡은 물론 우석(장발) 설초·청구·현초·이순석, 그리고 내가 모였었다.
회의장 분위기는 도강 파가 우세여서 우리는 서울에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도 서울에 남았던 게 무슨 죄나 되는 것처럼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기야 일부 좌경화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대부분이 본의 아닌 생존수단으로「억지춘향」이 노릇을 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 춘곡이 종군화가 단 사무국장을 역임한 서양화가 이세득씨를 조사위원으로 뽑아 옥석을 가리자고 했다.
A·B·C 3급으로 나누자고 대체적인 것만 결정하고 나머지는 실무진에게 위임했다. 이 회의에서 오늘날까지 유행하는「도강파」니,「종류파」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
도강파들이 도상봉·박상옥·이봉상·윤효중·김환기씨 등의 이름을 거론, 조사위원회에 넘겨졌다.
9·28 수복을 맞고 이런 일이 있은 얼마 후에 나는 공군 종군화가 단에 들어갔다. 미협 위원장인 고희동씨와 부위원장인 장발씨가 종군화가 단의 필요성을 인정, 창단을 서둘렀다.
장발학장은 공군을 창설한 김정렬 장군(전 국방부장관)과 친한 사이여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들은 모두 공군종군화가가 되었다.
장발 송병돈 김병기 김정환 이순석씨와 내가 공군본부에 가서 종군화가 증명을 발급 받았다. 빨간 사선이 두 줄 쳐있는 증명서에 사진을 붙이고 공군참모총장의 직인을 받아왔다.
증명에는「이 사람은 대한민국 공군종군화가 단임을 증명한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공군화가 단 말고 6·25 사변직후 대구에 내려간 국방부 정훈국이 주동해서 거기 내려와 있던 화가와 대구시내 미술교사를 중심으로 만든「미술대」가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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