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人 과학in] 연구자도, 연구 대상자도 남녀 균형 이루는 ‘젠더 혁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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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 06면

2002년에 제정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는 ‘여성과학기술인 육성·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해 시행하고 있다. 10년 이상 지속한 노력에 힘입어 이공계열에서의 여학생 진학 비율, 여성 박사 배출, 국가연구개발(R&D)사업의 연구책임자 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이 같은 일부 지표에서 나타난 성과에도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성별 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또 비정규직에서 특히 여성의 비중이 큰 점 등 아직도 개선해야 할 과제들이 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졸 이상 학력을 지닌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2%에 불과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CED) 회원국의 평균보다 20% 정도 낮다. 특히 우리나라 대졸 이상 학력의 남성에 비해 무려 30%나 떨어진다.

여성과학기술인 ‘일·가정 양립’ 도와줘야
고학력 여성과학기술인의 경우, 취업 시에 진입장벽을 제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도에 좌절하지 않고 직업을 유지하도록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많은 선배 여성과학기술인이 일과 가정 사이에서 일을 일단 포기하는 경우, 다시는 복귀하지 못했던 경험이 과학기술 후속 세대에게 일종의 학습효과로 작용하고 있다. 일을 포기했던 선배 세대와 달리, 지금은 결혼과 출산이라는 가정영역을 포기하는 선택을 내리는 경향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생존 차원에서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과학기술 환경을 만드는 일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 참여 확대는 젠더(gender)를 인지하는 미래지향적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도 시급하다.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므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수행하는 연구도 연구자의 성(性)과는 관계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연구에서 이런 생각이 오해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수컷 실험쥐를 대상으로 연구해 신약을 개발한 후 시판되었을 때, 여성에게서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그로 인한 약품 회수 사태가 벌어진 것이 단적인 예다.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는 연구개발에 의해 성 편향적인 지식이 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녀가 더불어 연구하고 연구 대상도 남녀 균형을 이루는 젠더 혁신이 강조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중요한 연구지원 프로그램의 연구계획서에는 반드시 젠더를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올해부터 시작된 대규모 연구개발 지원 프로그램인 ‘Horizon 2020’에서 연구자들이 젠더를 어떻게 고려해 연구할 것인가를 명시하도록 했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은 그동안 제3상 임상시험에서만 여성 대상자를 참여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올해 10월부터는 동물과 조직을 사용하는 모든 실험에서 성별을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 공학 분야에서도 남녀의 차이를 감안한 제품 생산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보조기구의 경우, 노인 여성이 더 많은 소비자가 되는 현실에서 젠더에 따른 심리·사회·문화적 특성에 잘 맞는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미국 국립보건연, 동물 실험 때도 성별 고려
이같이 젠더 인지적인 과학기술은 여성과학기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창의적인 기술창출과 기술혁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 연구인력의 참여 확대는 연구의 관점과 지평을 넓히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지므로 창조경제 실현에도 필수적이다. 여성 참여를 높이는 정책이 여성과학기술인 지원의 범주를 넘어 국가 차원의 젠더 인지 과학기술 정책으로 전환돼야 하는 이유다.

 이같이 미흡한 사안들이 올해 ‘양성(兩性)이 함께 이끄는 과학기술과 창조경제’라는 비전을 내건 제3차 기본계획에서 실질적으로 반영되고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과학기술인’의 역량 강화와 기회 확대 등 주로 사람 중심의 지원이었다. 앞으로는 여성의 과학기술 활동이 지속되도록 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또한, ‘젠더 이슈(gender issue)’가 고려된 학술활동 및 제품 개발을 통해 연구의 수월성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모두 높일 수 있도록 해야겠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백희영 회장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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