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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아프간 '녹색 혁명' 이끄는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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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권순영 박사가 노트북을 펼쳐 놓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고 있는 콩심기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LA지사=임상범 기자

"저는 한국전쟁을 겪었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잘 압니다. 동병상련인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돕고 싶었어요."

25년간 이어진 전쟁, 마약 수출국이라는 오명으로 짓눌린 아프가니스탄에 희망을 심는 한국인이 있다.

다국적 식품회사 네슬레의 의료식품 개발담당 이사인 권순영(57) 박사. 그는 전 세계 아편의 75%를 생산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녹색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양귀비 대신 콩을 심자'는 것이다.

"콩을 심는 게 아프가니스탄의 살 길입니다. 우선 양귀비 대신 콩을 심어 돈을 버니 마약 수출국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또 오랜 전쟁 때문에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린이와 여성들에게 콩은 훌륭한 영양공급원이 될 겁니다."

권 박사가 제안한 콩 심기 프로젝트는 마침 양귀비의 대체 작물을 찾던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채택됐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권 박사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2003년 설립한 비영리단체 NEI(www.nei-intl.org)에 30 에이커의 땅을 99년간 무상 제공하기로 했다. 지난해 4월 북부 발크주의 마자르 샤리프에 현지 토양에 맞는 종자를 심은 뒤 그해 9월 말 2t의 콩을 수확한 것이 콩 심기 프로젝트의 첫 결실이었다. 30년 전 콩 재배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모하메드 샤리프 농.축산부 수석 차관은 "NEI가 우리 일을 대신 해줬다"며 감격했다. 미국 국방부와 마약단속국도 관심을 나타냈다. 군인들을 동원해도 안 되던 일- 양귀비 재배 막기-을 NEI가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올 4월 12개 주로 확대됐다. 이들 지역에서 성공할 경우 아프가니스탄 전체 32개 주로 확산될 예정이다.

권 박사가 아프가니스탄을 처음 찾은 건 2003년 5월. 먼저 다녀간 지인이 권 박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아이들은 더러운 웅덩이물을 마셨어요. 평생 부르카(전신을 가리는 겉옷)를 입고 사는 여성들은 대부분 뼈가 약하더라고요. 햇빛을 많이 못 쬐는 게 주요 원인입니다."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선 신생아 20%가 다섯 살 전에 주로 설사와 폐질환으로 죽는다. 평균 16세에 결혼해 여섯 명의 아이를 낳는 여자들은 여섯 명 중 한 명꼴로 출산 도중 사망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권 박사는 NEI를 세워 본격적인 지원 활동에 들어갔다.

어려움도 있었다. 올 4월 아프가니스탄 12개 주에서 선발된 24명의 농업 전문가에게 교육과 실습을 시킬 때였다. 반응이 시큰둥했다. 1㏊에 양귀비를 재배하면 4000달러의 수입이 생기지만 콩은 1000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 한 청년이 일어나 "여자와 애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판에 눈앞 이익만 생각하느냐"며 열변을 토하자 참가자들의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농기구의 부족도 문제다. "다들 맨손으로 일합니다. 최소한 9월 콩 수확기에 사용할 농기구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권 박사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LA지사=안유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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