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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영천 황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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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국에 1만2천여명. 2백50여 성씨 가운데 인구순으로 1백7번째. 3천여명을 만나면 그 중에 한사람 낄까 말까다.
영천 황보씨를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두자 성 황보를 누르황자 황씨로 잘못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황보씨 자신들의 얘기다.
그러나 얘기가「단종 애사」에 이르고 사육신 김종서 등과 함께 불의의 권력에 피를 뿌린 노재상 황보인의 이름을 듣게되면 누구나『아…』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 충정공의 황보인이 영천 황보씨의 끝이며 시작이 된다.
그에 이르러 황보 가문의 영예가 극에 이르렀고 그의 대에서 황보씨가 멸문의 참변을 당했으며 다시 3백년 후 그를 의지해 황보씨가 충렬의 가문으로 살아나 오늘에 이르른다.
긴 세월 왕조와 권역의 흥망부침(흥망부침)속에 영고성쇠의 기복을 겪은 가문이 한둘일까 마는 영천 황보씨만큼 기구한 사연을 지닌 성씨도 아마 없을 듯 싶다.
영조22년 수양대군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여러 충신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황보인이 역적의 누명을 벗고 황보씨가 떳떳하게 성명을 밝히고 살 수 있게된 다음 꾸민 족보는 영천 황보씨의 시조를 고려 태조 왕건의 창업공신가운데 한사람 김강성 장군 황보능장으로 적고있다.
능장은 신라에 쳐들어간 후백제의 군사를 달구벌(현 대구)부근에서 격파하는 등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으로 봉함을 받고 지금의 경북 영천군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이를 인연으로 본관을 영천으로 쓰게 됐다는 것. 묘소가 지금도 전해내려와(현 영천군 고경면 묘암리소재)후손들이 봄가을로 제정을 받든다.
능장의 선조가 신라 말 당나라서 귀화해온 황보경이며 경의 증손이 능장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전거가 없다. 다만 황보라는 성이 우리 나라 토착의 성이 아니라 중국에서 귀화하거나 유입된 성씨인 것은 분명한 듯 하다. 본관은 영천 단본이다.
시조 이후 고려말까지 4백여년 황보씨 가제는 완전히 공백이다. 수양의 변란 때 멸문을 당하며 모든 가전기록이 없어진 때문이다.
후손들은 고려사 등 기록을 뒤져 신쟁·대목·헌애·헌정의 4왕후(왕후)와 6공신의 이름, 단편적인 행적을 찾아놓고 있다.
정종 때 문하평장사 (문하평장사)를 지낸 황보유의, 고종 조의 평장사 황보기, 명종 조의 학자로 강좌칠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던 황보항, 의종 조의 명신 황보도, 공민왕 때 홍건적을 격퇴한 황보림 등이 고려대 황보가문이 배출한 인재들.
문벌이 중시되던 고려시대 단편적인 이점도 기록만으로도 황보씨가「융성을 누리던 명문대가」였음은 쉽게 짐작된다.
후손들은 고려말 진주목사를 지낸 안으로 부터 새로이 세계(세계)를 헤아리고 있다.
안을 1세로 현재 25세까지 대가 이어진다.
안의 아들이 앞서 말한 임. 홍건적을 격파한 공으로 1등 공신을 받고 요동정벌 때 부원수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가담, 조선개국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벼슬은 지중추원사 (종2품)에 이르렀다. 임의 아들이 바로 충정공 지봉 황보인.
25살에 가문의 음덕(음덕)으로 사헌부 감찰에 등용된 뒤 태종·세종·문종의 3대를 섬기며 도승지, 강원도관찰사, 평안도·함길도감체찰사·좌찬성·우의정·좌의정의 중직을 두루 역임, 조정의 중신이 된다. 문종2년 벼슬길에서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66세.
우리 나라 여러 두자 성 (복성) 가운데 재상을 낸 가문은 오직 황보씨뿐이라는 것이 지금도 후손들이 갖는 긍지다.
문종이 이듬해 돌아가고 14살 소년단종이 왕위에 오른다. 문종은 돌아가며 어린 아들을 황보인·김종서 등 중신들께 부탁한다.
왕위를 노려 권력에 주린 불한당패거리들을 모아 음모를 꾸미는 수양대군과「어린 왕자」를 지키려는 조정 구신 (구신)들의 팽팽한 대결은 불과 1년여만에 파국으로 끝나고 우리역사는 크나큰 비극을 경험하게된다.
이른바「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쥔 자가 합리화했던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그것.
권력을 위해 끝내는 어린 조카와 동생까지도 죽이고만 수양의 쿠데타는 문종이 죽고 불과 1년 만인 1452년10월10일 밤에서 11일 새벽사이에 벌어졌다.
단종의 비사를 적은「장능지」에서 황보공의 순절사기를 보자.
…황보인·김종서·정?은 삼공인데 종서는 지략이 많으니 먼저 제거하려고 10월10일(수양이)몸소 양정·유수·유숙과 임운 등을 거느리고 어두울 때 종서의 집에 갔다. 나올 때 대문까지 전송을 하는데 뜰에서 또 한참 이야기를 하니 종서의 아들 승규도 나와서 그 옆을 떠나지 아니했다. 수양이 엎드리며 사모 뿔이 떨어지자『청컨대 정승것을 빌려주시오』청하니 종서가 승규를 시켜 안으로 가지러 보냈다.
그때 유정·임운 등이 종서를 쳐 눕히니 승규가 급히 달려와 구하려 했으나 또다시 쳐서 죽였다.… 수양이 급히 군졸을 이끌고 주상(단종)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종서가 모반하기에 사세가 급박해서 계청할 겨를도 없이 이미 죽었다』고 말하고『황보인·이양·민신·조극관·윤처공 등이 다 연결되었고 함길도 절제사 이등옥 등이 안팎으로 호응, 종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적괴를 이미 제거했으니 나머지 잔당들은 지금 토벌하려고 상계합니다』하니 겁에 질린 단종이『오직 숙부께서 나를 살리십니다』 고 했다.
수양이『어렵지 않으니 신이 다 처결하겠나이다』하고 나와 중신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금군으로 둘러싸 3중문을 만든 다음 한명회가 생살부를 가지고 입구에 앉아 가려 들여보내니 이름이 사부에 있는 자는 무사들이 쳐서 죽였다. 그때 황보인·조극관·이양 등은 다 죽고 윤처공 등은 사람을 보내서 죽였다….
억울하게 참살 당한 자가 3백여명. 가문은 멸문을 당하고 가족들은 관노로 천민이 됐다. 어떤 사가는 수양의 이 쿠데타를 두고 조선조를 망하게 한 당쟁의 씨앗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잡기 위해 조카·동생 등 혈육을 죽이고 곧은 선비들을 역적으로 몰아 학살한 살인자들이 나라를 요리하게되니 악이 선으로 뒤바뀐 세상이 됐다. 절의와 명분을 숭상하는 선비들은 조정을 등질 수밖에.
권세와 시속을 쫓는 기회주의 벼슬아치와 산림의 지조파 간에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반목·질시가 싹트게됐다는 분석이다.
『지봉 할아버지가 화를 입으면서 석·흠·은 세 아드님 가운데 위로 두 분과 석의 아들인 원·문 등 장성한 손자들까지 모두 다섯 분 어른이 그때 화를 당하셨습니다. 나머지 일족은 뿔뿔이 도망하거나 붙잡혀 섬이나 먼 변방에 관비로 천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성을 바꿔 숨기도 했겠지요. 』 대구종친회 전 회장 황보균씨(65)는 조상의 사적을 얘기하다말고 잠시 목이 멨다. 위문의 칼날을 피해 풍비박산 달아나던 황보가의 엑소더스 출한양기 가운데 백미는 여종 단양의 눈물겨운 의거.
단양은 젖먹이인 흠의 외아들 단은 물동이에 숨겨 이고 집을 빠져 나왔다. 안동 닥실(현 경북 봉화군상운면)까지 8백여리를 걸어 지봉의 막내사위 윤당의 집을 찾았다.
윤당은「역적의 자식」이 바깥 사람들의 눈에 띌까 새 옷을 해 입히고 단양에게 노자를 줘 다시 달아나도록 내보냈다.『어디든지 땅 끝까지 가서 살되 어미처럼 이 아이를 키우고 크거든 조상을 일러 주라.』
단양의 발길이 멈춘 곳은 정말 땅이 끝나는 구룡포읍 대보동. 지도를 놓고 보면 반도에서 꽁지모양 튀어나온 장?꽂의 끝 부분, 더 이상 갈곳이 없는 해변이다. 이곳에서 황보가는 간신히 맥을 이어 이후 3백여년 은인(은인)의 세월을 견딘다. 무엇이 이 여종에게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도록 했을까. 황보인의 세 아들 석·흠·은의 가계가 모두 이어진 것은 기적이라면 기적. 현재 전국의 황보씨는 구룡포 일대에 1백20여 호, 영천에 40여 호가 집단마을을 이루고있고 그밖에 서울 대구 부산 포항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산다.
가구주인 성인 남자만으론 전국을 헤아려도 3천여명. 이름을 대면 서로가 금방 알만큼 전국이 한집안이다.
황보씨가 다시 떳떳이 성명을 밝히고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수양의 폭거 후 2백93년 만인 영조 22년. 숙종 때부터 시작된「역사바로잡기」논의가 80여년만에 결말을 보아 단종의 왕호가 복구된 데 이어, 황보인·김종서 등 삼상의 관직도 복구됐다. 충신을 충신이라고 부를 수 있게됐다.
전국의 유림들은 충절을 지켜 순사한 이들을 다루어 서원에 모시고 추앙하게됐다.
1만2천여 일족 가운데 물리학박사 황보한씨(50)가 미NASA서 활약 중. 한국관세사회부회장 황보용(49), 한국일보 업무부국장 황보철규씨(54·서울지역종친회장) 와 전 국민은행 대구지점장 황보덕규(68), 전 대구여중 황보균씨 (66) 등이 있다.
글·문병호 기자 사진·이호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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