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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봉지모아 과일장수할머니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걸 다 어쩐담….』
수돗가에 아무렇게나 널려진 빈봉지 더미를 보며 나도 모르는새 중얼거렸다
다섯가구가 모여사는 우리집은 다른 집보다 빈봉지가 많이 나돌게 마련이다. 수돗가에 내팽개쳐진 지저분함은 차치하고라도,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어느틈엔가 쓰레기통을 빠져나온 빈 봉지들은 팔랑개비가 되어 세상을 휘젓고 다니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걸 어쩐담…』
날아다니는 빈봉지를 잡느라 종종거리며 다니다가 문득 봉지 하나라도 더 붙이기위해 밤을 지새우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빈봉지 있으시면 버리지말고 저를 주셔요)
각방을 돌아다니며 부탁을 해둔 덕택에 열홀도 채못돼 쌓인 봉지는 1백장을 넘었다.
『엄마, 봉지는 모아 뭘 할거야?』자꾸만 쌓여가는 봉지를 보고 궁금해하는 딸아이에게 『글쎄, 쓸데가 있겠지』하면서 얼버무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1백장을 돌파하게된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하리라)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봉지가 가득담긴 장바구니를 챙겼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시장길을 헤집으며 두리번거리는 내게 한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시골에서 올라온성 싶은 할머니는 잘 익은 홍시를 꾸러미로 만들어 팔고있었다. 『할머니, 이봉지 뒀다 쓰세요』약간은 겸연쩍어 붉혀진 얼굴로 빈봉지 한꾸러미를 내놓은 나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제일처럼 기뻐했다.
그날 이후 딸 아이는 아빠가 과일봉지를 들고 오기가 무섭게 쪼르르 달려나가 봉투를 얼른 빼서 장바구니에 담아 두곤한다. 어린 눈에도 할머니의 기뻐하던 모습이 퍽 좋았던 모양이다.
집안에 빈 봉지만 보면『엄마!』하고 집어드는 딸아이 덕분에 「봉지2대」라는 별명까지 얻어들었지만 그것이 조금도 귀에거슬리지 않는다.
말짱한 봉지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고, 쓰레기량도 줄어들어 청소부아저씨도 일이 편하고, 종이 한장이 새로운 시골할머니가 요긴하게 쓸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빈봉지를 보며, 내일쯤 시장엘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주름깊은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띠고 내손을 어루만져줄 할머니의 까칠한 손이 떠오른다.
『젊은이, 또 왔수?』하는 소리와 함께. <전남광주시서구치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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