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부인이 OK해야 다음 장면 찍었던 초보 감독 히치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6호 14면

앨프레드 히치콕(1899~1980) 감독은 영국과 미국에서 총 50여 편이 넘는 장편을 연출했으며, 초기 무성영화와 컬러영화 시대까지 두루 경험하며 영화사의 절반을 넘게 쓴 인물이다.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3> 감독 히치콕과 부인 알마 레빌

그의 이름에서 따온 ‘히치콕키언(Hitchcockian)’이라는 단어는 공포감과 긴장을 자아내는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어떤 이는 히치콕을 ‘사이코’로 대변되는 공포물의 대가로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옥수수밭에서 비행기가 엄습하는 스릴러의 긴장감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히치콕의 가장 오랜 관심사 중에 ‘히치콕적인’ 것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가 있다. 그것은 히치콕의 영화가 남녀 ‘로맨스’의 모험을 즐겨 다뤘다는 점이다.

히치콕은 런던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1920년 영화사에 입사해 자막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곧 미술감독을 맡게 되었고, 어느새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을 오가며 직접 연출까지 하게 된다. 영화사에서 미술감독이 연출작가가 된 경우는 드물다.

이 무렵 히치콕의 눈을 사로잡은 알마 레빌(1899~1982·이하 알마)은 히치콕보다 5년 앞서 영화계에 입문한 선배였다. 알마는 편집실에서 일을 돕는 것 외에도 스크립트를 담당하거나 시나리오 수정 집필도 했다. 편집기사와 시나리오 편집자 역할을 한 셈이다.

히치콕은 ‘여자 대 여자’의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에다 미술감독까지 겸하는 상황이 오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퇴사한 알마에게 전화를 건다. 이즐링턴에서 함께 일한 적은 있지만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위험한 환경에서 탄생하는 연인들
첫 연출작 ‘쾌락의 정원’의 촬영이 1925년 5월에 시작됐다. 초보 감독 히치콕은 당대 인기 여배우였던 버지니아 발리를 바라볼 때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연기를 지시할 때는 너무 겁이 났습니다. 내 미래의 아내에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릅니다.”

촬영이 끝날 때마다 히치콕은 매번 알마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알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비로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어서 촬영된 ‘산독수리’를 함께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이 배를 흔들었는데, 알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침상에서 발작적으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릴 때, 객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히치가 들어왔어요.” 그리고 히치콕이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요?”

이 일화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으나, 중요한 건 히치콕의 로맨스 영화에서는 늘 풍랑이나 폭풍 같은 위험한 환경이 바로 연인들을 맺어주는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해외특파원’과 ‘구명선’에는 바다 위에서의 청혼이 등장하고, ‘리치 앤 스트레인지’, ‘찢어진 커튼’에도 선상 로맨스가 등장한다. 특히 ‘리치 앤 스트레인지’는 히치콕 부부의 진짜 로맨스에 기초한 영화이기도 했다.

바다와 폭풍우를 벗어나면 위기에 처한 연인들이 커플로 맺어지는 순간은 ‘39계단’,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새’에서도 반복된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히치콕과 알마는 26년 12월 2일 런던 브롬튼 성당에서 결혼서약을 했다.

촬영 현장 이끌던 부인 알마의 존재감
그런데 위기에서 맺어진 커플은 결혼 후에는 어떻게 변할까? 히치콕이 TV와 영화를 오가며 전성기를 누리던 1960년에 완성한 ‘사이코’의 현장은 이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사차 제바시 감독이 2012년 선보인 영화 ‘히치콕’은 스티븐 레벨로가 쓴 『히치콕과 사이코』를 원작 삼아 ‘사이코’ 제작 당시의 히치콕 부부를 등장시킨다(히치콕 역에는 앤서니 홉킨스, 알마 역에는 헬렌 미렌, 그리고 야심작’사이코’의 여주인공인 자넷 리 역은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제작기가 아니라 히치콕 부부의 미묘한 감정싸움이 테마다. 히치콕은 알마에게 접근하는 멋진 중년 시나리오 작가 휘트를 경계하는 한편, 새로운 영화 ‘사이코’를 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여배우를 물색하던 히치콕은 자넷 리를 만나 은근히 추임새를 던지고, 알마는 그런 히치콕의 태도에 신경질을 내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영화 ‘히치콕’은 거장 부부의 뒷모습과 권태에 빠진 일반 부부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당신, 휘트랑 바람피워? 그 재능 없는 머저리랑 왜 온종일 붙어 다녀?” 히치콕의 신경질에 알마가 분노에 찬 대답을 한다. “지난 30년간 당신의 모든 영화에 그랬듯이 첫 시사 때마다 당신은 내 의견을 물었고 평이 좋으면 함께 웃고 나쁘면 함께 울었죠. (…)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위대한 천재 앨프레드 히치콕뿐이니까! 그런데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히치콕의 작품이 아닌 딴 작품을 한다고 당신한테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해요? (…) 잊었나 본데, 난 당신 아내 알마 레빌이에요. 당신이 그 ‘독특한’ 연기 지도로 괴롭히는 금발 여배우가 아니라고!”

영화 ‘히치콕’은 히치콕을 대신해 현장을 지휘하는 알마 레빌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녀야말로 히치콕의 진정한 숨은 작가였고 히어로였다. 하지만 최대 히트작 ‘사이코’는 결혼생활에 혐오를 느끼는 한 정신이상자의 엽기행각과 불륜과 권태를 둘러싼 히치콕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다. 시작은 샘과 희생자 마리온이 대낮에 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들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은 살인마 노먼이 거주하는 베이츠 모텔로 이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뒤에는 처벌과 광기가 도사린다. 영화 속 히치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잖아!”

결혼 생활에 대한 불안이 영화로
알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제작한 히치콕의 영화들은 처음부터 결혼생활에 대한 불안을 깔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다이얼 M을 돌려라’는 아내가 옛 동창이자 추리소설가인 마크와 사랑에 빠지고 사업조차 곤경에 처하자 아내의 유산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계획하는 남편을 묘사한다.

물론 ‘사이코’의 마리온처럼 여주인공을 난도질하는 경우는 드물기는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진정한 충격은 난도질이 아니라, 여주인공이 시체로 변해 중반부 이후론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한 모험가 커플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 진정한 불화의 판타지이자, 히치콕이 탐구했던 중년의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