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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보고 새롭게 봤더니 새로운 문이 활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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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17면

최욱의 작품. 문의 형태가 열고 닫는 행동과 시야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려준다.

흔히 이중적 속성을 지닌 자를 ‘야누스’라 한다. 야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문(門)의 수호신으로, 앞뒤로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에 앞뒤가 없다고 생각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름지기 기획전 ‘소통하는 경계, 門’전을 가다

기실 문은 ‘두 개의 얼굴’만이 아니라 그 성질 자체가 대조적이다. 생명체로 치자면 암수동체다. 행동에서는 열었다 닫는 것이요, 상태로 보면 트였다 막힌다. 공간과 공간을 구분 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되, 그 쓰임은 경계를 건너려는 통로에 둔다.

10월 8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리는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의 기획전시 ‘소통하는 경계, 문門’은 이런 문의 속성을 새롭게 조명해 보는 행사다. 아름지기는 2004년부터 매년 의식주와 관련된 전통문화 중 하나를 골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벌여왔는데, 올해는 네 번째 주(住)생활 전시로 ‘문’에 주목했다. 재단 측은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문을 통과하면서 공간과 공간의 경계에 서 있다. 무의식적으로 겪는 일이지만 그 경계들과 소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로 전시의 의미를 피력했다.

이번 행사에는 전통건축 전문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이 함께 참여해 전통 부문 한 섹션과, 현대 부문 두 섹션을 꾸몄다. 그들은 뻔하게 여겨지던 문을 낯설게 보고, 달리 생각하고, 새롭게 바꿔 놓았다. 과거와 미래의 문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었다. 수많은 문의 얼굴들이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여닫는 방식도 소재도 새롭게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1층에 들어서면 하얀 천이 천장부터 드리워져 시선을 압도한다. 동선이 없어도 자연스레 ‘문이 어디 있는지’를 찾게 되는 상황이다. 전시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 제법 그럴듯하다.

‘건축가의 문’이라 명명한 이 섹션은 건축가 4개 팀이 참여해 저마다 ‘문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펼쳐냈다. 아파트라는 획일화된 주거 문화에서 당연히 문도 판에 박힌 모양일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문은 최욱(ONE O ONE Architects)의 작품이다. 그 모양새가 특이해서 어떻게 열어야 하나 잠시 생각하게 된다. 양쪽 문짝 중 한쪽에는 꼭대기에서 중간까지 나무 봉 손잡이가 달려 있다.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내보니 자연스럽게 열린다. 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서다.

진짜 재밋거리는 반대쪽에 있다. 나무 손잡이 봉이 문짝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옆이 아닌 앞뒤로 밀게 돼 있다. 힘을 줘 보면 반전이 나타난다. 문과 직각으로 마주한 벽까지 움직인다. 벽이 문이고, 문이 벽이다. 열고 닫는 동작과 구조를 달리한 문. 우리의 행동을, 공간의 풍경을 바꿔 놓는다.

최문규(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작업한 두 번째 문 역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언뜻 보면 평범하다. 하얀 문짝에 흔히 보는 동그란 철제 손잡이가 달려 있다. 하지만 열고 들어오는 순간 알게 된다. 문은 마치 납작한 직육면체로 변해 있다. 게다가 반대쪽 문짝은 흑빛, 손잡이도 직각의 모양이다. “크기도 색도 재료도 다른 문을 통해 문의 안과 밖이 정말로 다른 세계인 것 같은 문을 만들고자 했다”는 작가의 제작 의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병수(BCHO Architects) 역시 안과 밖이 다른 문을 만들었지만 재료가 독특하다. 나무 각재 위 한쪽에는 재활용 골강판을, 다른 한쪽에는 재활용 합판을 붙이는 방식이다. ‘디자인한 것도 디자인하지 않은 것만 못할 수 있다’는 기발한 생각으로 재료 고유의 느낌을 살렸다.

네임리스 건축(나은중, 유소래)팀은 ‘보일 듯 말 듯한’ 전통 문의 경계성을 재해석했다. 창호지의 반투명성과 격자 나무살에서 모티브를 얻어 반투명 실리콘으로 문을 만들어냈다. 닫힌 상태에서도 빛과 실루엣이 전달되는 문의 소통력이 전해지는 아이디어다.

가변적으로 공간을 분리시키기 위해 쓰였던 판장과 판문. 전통 기법과 달리 상부를 나무살로 처리해 안과 밖이 통하도록 했다.

동궐도 속 문을 현대적으로 해석
야외인 2층 전시 마당으로 올라오면 두 번째 섹션 ‘동궐도에서 다시 찾은 잊혀진 경계들’이 펼쳐진다. ‘동궐도’란 창덕궁과 창경궁의 19세기 초반의 모습을 담은 그림.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의 전문가들이 이를 바탕으로 현대에 보기 힘든 다양한 문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바로 계단 끝에 동궐도를 재현한 ‘취병’과 ‘취병문’이 자리한다. ‘취병’이란 관목류나 덩굴성 식물 등을 심고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모양으로 만든 울타리, 취병문은 이와 연결된 문을 말한다. 이들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들어갈 수는 없는 오묘한 경계를 만들어낸다. 본래 울타리 골격은 대나무로 만들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철제 강관을 이용했고, 또 현장에서 조립이 가능하도록 현대화를 꾀했다.

마당 한가운데 설치된 ‘이문(二門)’ 역시 새롭기는 마찬가지다. 높고 낮은 두 문이 나란히 한 쌍을 이루는 ‘이문’은 문의 이중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높은 문으로는 왕족이, 낮은 문으로는 궁인들이 출입했다는 추측이 지배적인데, 높은 문은 문짝을 달아 줄곧 닫혀 있지만 낮은 문은 문짝 없이 휘장을 쳐서 줄곧 열려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문은 거의 닫혀 있고, 거의 열려 있는 문을 나란히 배치해 그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문과 연결된 ‘판장’은 일종의 이동식 파티션이다. 궁궐 영역 내부를 구획하기 위해 가변적으로 설치됐기에 경계의 가벼움을 대변해 준다. 그리고 그 경계에 ‘판문’이 결합돼 있다. 이번 작업에서는 전통 방식과 달리 판장 상부를 살로 제작해 밖이 보이도록 해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이 특징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디자이너들의 감성이 돋보이는 ‘제 3의 문’이 관람객을 반긴다. 이 섹션은 공예 디자이너 최정유와 산업 디자이너 김종환이 현대 생활방식에 유용한 또 다른 문을 제안하는 코너다.

최씨의 경우 아시아 각국의 전통 공예를 현대화하는 ‘아시아 공예디자인 프로젝트’ 참가자 중 하나. 그래서 이번에도 베트남 호이안에서 영감을 받은 색과 이미지, 그곳만의 재료와 제작기법을 활용한 오브제를 만들었다. 공간과 공간의 심리적 경계를 흐리하게 만드는 핸드페인팅 기법의 실크 발, 골풀이라는 현지 소재로 만든 매트와 바구니 등은 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생활 소품으로 제시된다.

김씨는 산업 디자이너답게 가격과 생산성, 실용성 등을 염두에 두고 현관문 방충망을 제안한다. 한복 안감으로 쓰이는 노방을 이용하면서 조각보 문양을 방충망에 옮겼다. 드나듦에 불편함이 없도록 가운데를 잘라 자석으로 탈부착시킨 아이디어 역시 돋보인다. 숫자가 아닌 이름을 새긴 문패 는 문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아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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