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 내전에 대한 우려를 담은 분석 자료를 냈다. 핵 확산을 시도하는 나라들에 핑계거리를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라크·시리아에서 기세가 꺾이지 않는 이슬람국가(IS) 때문에 우크라이나 내전이 국제 뉴스의 관심사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에겐 향후 IS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 민감할 수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스트로브 탤벗 소장은 러시아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도 관여했는데 1994년 1월 모스크바에서 합의한 게 있고, 그해 또 다른 합의가 있었다. 여기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존중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다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소련권 담당대사에 이어 국무부 부장관을 잇따라 맡으며 러시아를 상대하는 최전방에 서 있었다.
소련의 핵 기지였던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붕괴 이후 갑자기 전 세계에서 세 번째 핵 보유국이 돼 버렸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176기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의 세 정상은 94년 1월 모스크바에서 ‘3자 합의’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러시아로 모두 넘겨 해체하되 대신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해 주고 경제적 보상도 제공하는 합의였다. 그해 미국과 러시아 등은 핵 포기에 나서는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를 보장해 주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발표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병합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벌어지는 내전을 배후 조종하는 당사자가 됐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내전이 우크라이나만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을 붙잡고 있는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들어 생존권 운운하며 핵 개발의 핑계로 내세울 수 있어서다.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핵은) 생존권·자주권의 문제”라고 주장한 것처럼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따른 체제의 위협 때문이라며 핵을 개발해 왔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적대시 정책의 정통 원조는 북한이다.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지금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앵무새처럼 체제 수호용이라고 반복해오다 이젠 6자회담조차도 핵 보유국의 위치를 인정받는 전제에서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는 무대로 변질시키려 한다. 우크라이나에 내전이 있건 없건 북한은 핵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전은 북한엔 소재가 될 수 있다. 북한 때문이라도 우크라이나 사태는 빨리 해결돼야 한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