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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40여년 뛰어 넘은, 우리 것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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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차범석 작, 임영웅 연출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6월 4일까지 '산불'이 공연되고 있다. 1962년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2005년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 복원 및 재창조 작품의 하나로 선택된 것이다.

이 작품은 과부인 양씨(강부자 분)와 최씨(권복순 분) 집안의 사상적 갈등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이보다도 양씨의 며느리 점례(곽명화 분)와 최씨의 딸 사월(계미경 분)의 애욕의 갈등을 더 짙게 보여준다. 특히 산에서 도망친 빨치산 규복(주진모 분)을 둘러싸고 벌이는 점례와 사월의 갈등은 1960년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반공극의 경직된 틀을 벗어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 대립을 넘어서 다양한 여성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연극사의 대표적 리얼리즘 희곡인 이 작품은 임영웅의 연출로 더욱 분명한 현실성을 띤다. 이승옥, 이혜경, 조은경, 양말복 등의 국립극단 배우들의 연기는 극 중 여인들의 개성을 잘 보여주면서도 앙상블을 잃지 않아 편안하다. 여기에 단역으로 등장하는 김재건, 서희승 등의 개성 강한 연기도 이러한 앙상블의 완성에 일조한다.

박동우의 무대장치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깊은 산중 외딴 마을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계절 감각과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박정수의 조명과, 사건의 긴장과 이완을 표현한 김기영의 음악도 작가와 연출의 의도를 빛내 준다. 다만 달오름극장의 무대 깊이가 얕아서 작품의 핵심적 장치인 '대숲'을 제대로 만들어 주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 때문에 점례와 규복이 대숲의 움막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행위와 동선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좋은 희곡은 끊임없이 재공연 되는 것이 당연함에도 우리 연극계에서는 이러한 고전의 발굴에 소홀함이 많았다. 이제는 셰익스피어 등 외국의 유명 작품의 재창조에 기울이는 관심의 일부분이라도 우리 고전의 유산을 정립하는 데에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산불'과 같이 4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다는 것은 우리 연극계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양승국(서울대 국문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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