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cover story] 현대판 품앗이, 대안화폐 써보니 쓸모 많아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 "대안화폐 써보세요. 좋~아요!"서울 송파구 대안화폐 송파머니(SM)의 '열혈애호가'인 박미순(右)씨. 그는 SM을 130여만원이나 가지고 있는 '알부자'다. SM은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무형의 돈'이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대형 지폐를 만들어봤다.

발마사지사 박미순(36)씨. 서울 송파구에 있는 전셋집 한 채가 그의 전 재산이다. 혼기까지 넘기며 일만 해온 '억척 처녀'치곤 많이 모은 편이 아니다. 그래도 미순씨는 동네에서 '알부자'로 통한다. 빳빳한 한국은행권은 아니지만 '송파품앗이'의 SM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SM 재산은 137만6000원. SM 10만원 가진 회원도 드물다니, 그쯤 되면 '재벌'인 셈이다.

생경한 단어들에 놀라지 말자. 우선 'SM'은 '송파머니(Songpa Money)'의 약자다. 송파구에서만 쓰이는 '대안화폐'다. '송파품앗이'는 이 화폐를 쓰기로 약속한 공동체. 송파구 자원봉사센터가 이끈다. '대안화폐'라는 거창한 말에도 겁먹을 필요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발사가 조수를 쓰고 싶다. 그런데 돈이 없어 못 쓴다. 조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조수는 머리가 길어도 돈이 없어 이발소에 못 간다. 이발사는 돈을 못 번다…. 대안화폐는 이런 악순환을 끊자는 발상전환의 결과다. 국가에서 찍는 돈은 소수에게만 몰려 늘 부족하게 마련. 그렇다고 나머지 다수가 경제활동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길은 없을까. 마음 맞는 이들끼리 서로의 용역을 살 수 있는 다른 지불 수단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대안화폐의 기본 개념이다.

미순씨는 발마사지를 해주고 현금 3만원을 받는다. 그러나 품앗이 회원들에게는 절반만 현금으로 받는다. 나머지는 SM으로 받기로 하고 수첩에 기록한다. 이로써 그는 다른 회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1만5000원어치를 이용할 권리를 얻는다. 드물긴 하지만 물건도 살 수 있다.

1999년 출범한 송파품앗이의 회원은 현재 620명. 이들은 지난해 SM 2383만여원어치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건수로는 2228건. 지금까지의 최대 '빅딜'은 12월에 있었다. 한 여성회원이 시가 45만원짜리 보석 목걸이를 경매에 부쳤다. 대금은 SM만 받겠다고 했다. 목걸이를 산 이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는 회원. 목걸이를 판 이는 이렇게 번 SM으로 시어머니께 미순씨의 발마사지를 받게 해드렸다. 목걸이를 산 이는 다른 회원의 피부관리를 해주며 '빚진' SM을 갚고 있단다. 그렇다면 SM을 45만원이나 번 박씨는?

"학습지 방문교사인 회원께 조카들 과외를 받게 했지요. 대안화폐 덕분에 돈 한 푼 안 들이고(?) 고모 노릇 톡톡히 했어요."

대안화폐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불황의 그늘 탓에 서로가 서로의 노동력을 사주는 '삶의 지혜'에 눈을 돌리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번 주 Week&은 우리와는 다른 돈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가 봤습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입을 모으더군요. "진짜 돈으로 못 사는 걸 대안화폐로는 살 수 있어요. 이웃간의 정도 그중 하나죠"라고.

글=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대안화폐는 이웃간의 정(情)도 북돋워준다. 정비소 사장 박용극(윗사진(右))씨가 수리비의 20%를 '송파머니'로 받고 차를 고쳐주는 사이 손재주가 좋은 황수연씨는 가게 한구석에 있던 선풍기를 손봐주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거래'가 성사되면 각자의 회원수첩(下)에 기록을 한 뒤 센터에 보고한다.

차 좀 봐줘, 선풍기 고쳐줄게

서울 송파구의 대안화폐 '송파머니(SM)'를 쓰는 '송파품앗이' 회원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다. 회원 620여 명 중 40% 정도는 생업으로 SM을 버는 사람들이다. 피아노조율사.네일아티스트 등 어지간한 직업은 다 있다. 이들은 서비스료 중 일부를 회원 고객과 상의해 SM으로 받는다. 나머지 60%는 부업으로 SM을 버는 이들이다. 아기 돌보기, 제빵기술 지도….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이런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거래를 하다 보니 온갖 사연이 끊이지 않는다.

글=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현대판 품앗이 대안화폐

현금 한 푼 안 쓰고 세 아이를 미술학원에

문정동에서 미용실을 하는 김상화씨의 가위질엔 흥이 묻어난다. 가위가 움직일 때마다 아이들의 꿈도 커간단 걸 알기 때문이다. 상화씨는 초등학생 3남매를 두고 있다. 남들은 아이들을 온갖 학원에 보낸다고 수선떨 때, 김씨는 그런 엄두를 내보지 못했다. 남편 사업 실패에 빚 갚기도 버거웠던 탓이다.

그러나 송파품앗이에 가입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김씨의 형편을 알게 된 회원들이 '꾀'를 냈다. 우선 피아노 학원을 하는 주진숙씨는 1인당 8만원 하는 학원비를, 2만원씩만 현금으로 받고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나머지 18만원은 SM으로 받겠다고 했다. 미술학원장인 김옥희씨는 아예 30만원이 넘는 세 아이의 학원비를 SM으로만 내라고 해줬다. SM으로 학원비를 내면 우선 현금이 들지 않아 좋다. 게다가 '마이너스(-) 계정'도 가능해 품앗이 회원들을 손님으로 받아 천천히 갚아나가면 된다. 기한은 없다. "친구들처럼 학원에 다니지 못해 풀이 죽어있던 아이들이 확 달라졌다"며 웃는 김씨는 "SM이 아이들 인생을 바꿔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웃간의 따뜻한 정(情)은 덤

무역대리상을 경영하는 황수연씨는 재주가 많다. 그래서 1999년 송파품앗이에 가입할 때 신청서에도 영어교습, 자동차 정비, 전자제품 수리 등 여러 가지 특기를 적었다. 그리고 이런 다재다능함 덕분에 황씨는 이웃 간의 정을 확인하는 기회를 가졌다.

2003년 어느 날 밤 11시가 다 됐을 때 홍씨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품앗이 회원이라고 밝힌 여성은 "수도꼭지가 고장이 나서 물이 샌다. 밤이 늦어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데 와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황씨는 즉시 공구함을 챙겨들고 '출동'했고, 큰 고장은 아니어서 금세 수도꼭지를 고칠 수 있었다. 그러자 집 주인은 "수고비를 드리고 싶다"며 현금을 자꾸 건네려 했고, 황씨는 "밤이 늦었는데 오히려 믿고 불러줘 고맙다"며 사양했다. 이 '아름다운 거래'는 황씨가 SM으로 1만5000원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황씨는 "요즘 세상에 이웃과 이런 교감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고선 모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실 대안화폐 운동은 회원들 간의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송파품앗이의 상근자 김수영씨는 "현금 대신 대안화폐를 받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다른 회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불경기에 가만히 앉아 단골 만드는 게 어디냐"

방이동에서 자동차 정비소 '카맨샵'을 운영하는 박용극씨. 그는 품앗이에 참여하면서 단골이 늘어난 경우다. 송파구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사는 아파트가 많아 정비소를 하기에 좋은 환경. 당연히 주변에 엇비슷한 규모의 정비소들이 몰려들었고 경쟁은 치열해져 갔다. 박씨는 이런 상황에서 손님의 소개로 SM을 알게 됐고, 큰 기대 없이 그냥 가입했다. SM 사용 비율은 서비스료의 20%로 정했다. 처음엔 무슨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SM은 의외로 손님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현금이 덜 드는 만큼 멀리서라도 회원들이 찾아와 주기 때문. 그는 "불경기에 가만히 앉아 단골을 만드는 게 어디냐"며 "이렇게 쌓인 SM으로 '기 치료'를 받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했다.

피아노 학원장인 주진숙씨도 SM을 사업에 잘 활용하고 있다. 주씨는 학원비의 일부를 SM으로 받은 뒤 '주부 알바'들을 고용, 전단지를 돌린다. 또 원생들을 데리고 나들이갈 일이 있으면, 회원의 버스를 저렴하게 빌리기도 한다.

아직은 갈 길 멀어 … 회원수 늘리는 게 먼저

이렇게 '잘 돌아가고 있는' 송파품앗이의 SM도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 우선 회원 수가 더 늘어나야 한다. 현재 송파구민은 62만여 명. SM이 명실상부한 '송파구 대안화폐'가 되려면 적어도 이 중 10% 정도는 회원이 돼야 한다. 특히 각종 소매업자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지금도 SM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하다. 그러나 매달 열리는 월례회 때 회원들이 집에서 들고 나온 것들을 교환하는 수준으로 한계가 있다. 송파품앗이의 김수영씨는 "이와 함께 품앗이 조직이 동 단위로 활성화돼야 한다"며 "규모를 줄여 생활에 밀착할수록 대안화폐 운동은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대안화폐 역사

캐나다서 시작…국내엔 외환위기 직후 등장

대안화폐는 1983년 캐나다에서 탄생했다. 거대 자본주의의 틈새를 '다른 돈'으로 메워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마이클 린턴. 당시 캐나다에는 불황으로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생계를 위협받는 이가 많았다. 린턴은 이런 상황이 '중앙정부의 화폐가 늘 부족하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리고 대안화폐를 만들어 서로 노동력을 사주자는 의견을 내놨다. 이에 따라 그는 우선 자신이 살던 섬마을에 대안화폐를 도입하고 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레츠(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라 불렀다. 이후로 20년. 현재 세계에는 3000개 이상의 레츠가 존재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의 순수한 교환수단으로서의 돈을 만들어 즐겁게 쓰고 있다.

캐나다 태생의 이 '즐거운 돈'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98년. 역시 외환위기 직후 국내 경기가 최악의 불황이었던 시기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단체가 먼저 'FM(Future Money)'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쓰면서 불을 댕겼다. 이어 불교환경교육원의 회원들이 '두레'라는 공동체를 만들었고, 인천정보통신센터도 '레츠 코리아'를 만드는 등 수많은 레츠가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이 불황이면 생겨났다 경기가 호전되면 사라지고 마는 해외 대안화폐들의 선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레츠는 모두 30여 곳. 그러나 대안화폐 사용이 활발한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중 '송파 품앗이'와 대전지역의 '한밭 레츠', 그리고 경남 함안의 녹색대학 등에서 대안화폐가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98년 '1세대'로 시작한 '한밭 레츠'는 2004년에만 무려 4919건의 대안화폐 거래를 성사시켰다. 금액으로는 무려 5300여만원어치. 이들의 화폐단위는 '두루(1두루=1원)'다. 2003년 개교한 녹색대학은 '사랑(1사랑=1원)'이란 대안화폐를 쓰고 있는데, 지난해 거래 규모가 2억 사랑을 넘어섰다. 게다가 이 대학은 대부분의 레츠가 '상상의 돈'을 쓰는 것과 달리 조폐공사에 의뢰해 제대로 된 화폐를 발권하기도 했다.

남궁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