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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사 지킴이' 석당 최남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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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8일 경주에서 우리나라 고고학의 선구자이며 이 시대의 '신라문화 지킴이'였던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1905~80)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된다. 선생은 반세기에 걸친 신라 문물의 발견으로 그 어떤 고고학자도 따를 수 없는 불멸의 업적을 일궈내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렸고 서양으로 말하면 트로이의 발굴로 근대고고학을 처음으로 구축한 슐리만처럼 우뚝한 인물이다.

선생의 수많은 업적 중 첫 손에 꼽는 것은 역시 26년 10월 10일의 서봉총(瑞鳳塚) 발굴이다. 당시 일제 하의 조선을 방문한 유럽 굴지의 고고학자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당시 44세.훗날의 구스타프 6세)가 선생과 함께 한 고분을 발굴하자 뜻밖에도 금빛 찬란한 금관이 출토됐다. 우리나라 고고학상 금자탑으로 일컫는 이 이름없는 한 무덤은 스웨덴의 한자 표기 첫 글자의 '서(瑞)'자와 금관의 머리장식인 봉황의 '봉(鳳)'자를 따 서봉총이라 했다.

다음은 34년 10월 31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발견이다. 그때 헌강왕릉의 묘지기가 자기집 앞 돌다리에 글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해서 석당이 조사해 보니 바로 옛 비석 글귀는 20자 9행의 육조서체(六朝書體)의 이두문, 591년(진평왕 13년) 남산신성의 축성비(築城碑)였다.

내용은 '법대로 축조한 성벽이 3년 안에 무너지면 죄를 받겠다'는 서약서로 공구 담당자들의 관등.성명.거주 지명 등이 적혀 있어 신라의 공권력과 신라인의 책임감이 잘 나타나 있다. 더더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합치하고 신라 금석문 중에서는 연대가 진흥왕순수비 다음가는 것이며 이두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 한 가지를 소개하면 57년 봄 석당은 연희학교(지금의 연세대)의 민영규 교수, 아들 정채군과 함께 경북 안강읍의 흥덕왕(興德王)릉을 찾았는데 정채군이 '홍덕' 두 글자가 새겨진 단비(斷碑.비 조각)를 찾아냈다. 비석은 머릿돌.빗돌은 없어지고 받침대만 남아 확실한 묘주(墓主.묻힌 사람)를 알 수 없었는데 단비의 발견으로 흥덕왕릉으로 굳혀진 것이다. 그러나 이 훌륭한 발견에는 매우 씁쓸한 뒷이야기가 있다.

이날 현장에서 석당은 민영규 교수의 간청으로 이를 연희학교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당시에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뒤 없어진 것이다. 석당은 타계하실 때까지 항상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고, 민 교수도 아무 말없이 올해 타계하고 말았다. 지성이 아니라 지욕이 빚어낸 하나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한평생 청빈한 생활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오로지 나라 사랑으로 신라 역사를 찾은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면서 오늘날 우리는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역사 찾기와 지키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중대한 역사의 시련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의 큰 줄기인 고구려사를 중국이 중화사관과 소수민족 이론으로 자국의 역사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역사 침략이다.

우리는 당당한 신라의 후손이요, 고구려의 후손이다. 고구려 역사를 지키는 우리의 행동은 비록 중국과의 외교.안보.통상 등 현실의 여건을 감안해 그 표출의 방법.시기.수위 등을 슬기롭게 조정해야 하지만 고구려사는 임전무퇴(臨戰無退)로 당당히 지켜야 한다. 그 방법과 지침은 선생께서 이룩하신 실사구시와 과학적인 연구다.

유영구 학교법인 명지학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