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시조] 주흘관을 지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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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흘관을 지나며

-박권숙

문경에 와서 문득 길이 새였음을 안다

긴 침묵의 부리로 석양을 쪼고 있는

거대한 저 바위들도 원래 새였음을 안다

죽지뼈 한 대씩을 부러뜨리며 길 밝히고

부신 뒷모습으로 재를 넘는 가을산

봉암사 극락전 한 채 봇짐처럼 떠메고

내게는 또 몇 개의 영과 재가 남았을까

그리움의 시위를 당겨 날개를 꿈꾼 이들

저렇게 새재를 넘어 먼 길 갔을 것이다

◆박권숙=1991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작품상, 최계락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시집 『그리운 간이역』 『모든 틈은 꽃 핀다』 등.

입시의 계절이 오고 있다. 산천초목도 일월성신도 모두 신이 되는 시간. 온 세상이 오체투지하며 소지 올리듯 지극한 마음을 바칠 것이다. 하늘도 무심할 수 없는 피 말리는 날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입문(入門), 대저 문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제의처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관문들은 끝이 없다. 제물인 양 목숨의 죽지뼈를 바치고서야 열리는 문.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하룻길조차도 입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문경 새재, ‘주흘관’을 지나는 이 시에선 길도 바위도 모두 새가 된다. ‘죽지뼈 한 대씩을 부러뜨리며’ 힘들게 눈길 밝히고 부신 모습으로 재를 넘을 때 가을산도 ‘봉암사 극락전 한 채 봇짐처럼 떠메고’ 고개를 넘는 큰새가 된다. 아름답고 험한 그 길을 세상의 날개 없는 이들도 ‘그리움의 시위를 당기며’ 팽팽한 마음의 날개로 넘어야만 한다. ‘내게는 또 몇 개의 영과 재가 남았을까’ 화자가 묻는다. 설의적이다. 하루하루 근근한 일상이 영이고 재인 것을 알 뿐이다. 다만, 살아서 꿈꿀 일이 남아 있는 한, 마지막 죽지 한 대도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란 믿음을 가져 볼 밖에 없다. 이미 관문을 빠져나간 지 오래된 당신이 가지고 돌아올 소식은 무엇인가. 거대한 날개를 거느린 주흘관을 지나며 이 시는 풍경의 경이로움에 경도되지 않는다. 스핑크스적인 고단한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시어 하나와 피 한 방울을 바꾸며 목숨처럼 작품을 짜 올리는 박권숙 시인. 세상의 두서없는 엄살들은 그의 시에게 모두 들킨다.

박명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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