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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끝 달렸다, 15세 아이언 걸 정혜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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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트라이애슬론 혼성 단체전 첫번째 선수로 나선 정혜림(오른쪽)이 다음 주자인 허민호와 터치하고 있다. 정혜림·허민호·김규리·김지환이 이어 달린 한국은 1시간18분39초를 기록해 일본에 이어 2위에 올랐다. 한국 트라이애슬론의 아시안게임 첫 은메달이었다. [인천=뉴스1]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이라서 ‘철인(鐵人)’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체력 소모가 극심한 세 종목(수영·사이클·마라톤)을 연결해 쉬지 않고 질주하는 경기,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이다. 일본과 중국에 눌려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던 한국에 괴물 신인이 등장했다. 생애 처음 도전한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15살 아이언 걸(iron girl)’ 정혜림(온양용화중)이다.

 정혜림은 26일 인천센트럴공원에서 열린 트라이애슬론 혼성 단체전에서 한국의 첫 번째 주자로 출전했다. 정혜림의 뒤를 이어 허민호(24·통영시청)·김규리(16·경일고)·김지환(24·통영시청)이 나선 한국은 줄곧 2위를 유지한 끝에 1시간18분39초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선두 일본(1시간17분28초)과는 1분11초 차였고, 또 다른 강자 중국(1분19초16)은 37초 차로 제쳤다. 한국 트라이애슬론이 아시안게임에서 거둔 첫 번째 은메달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정혜림은 ‘기선 제압’ 임무를 완수했다. 수영 250m와 사이클 6.6㎞·마라톤 1.6㎞를 20분1초에 주파해 참가 선수 12명 중 2위를 했다. 대회 직전 시뮬레이션 레이스에서 세운 자신의 최고 기록(20분4초)을 3초나 앞당겼다. 구간 1위를 차지한 일본의 철녀 사토 유카(19분46초)에 15초 뒤졌다.

왼쪽부터 김지환·김규리·정혜림·허민호. [인천=김성룡 기자]

 신진섭(36) 트라이애슬론 대표팀 감독은 정혜림을 ‘기적’이라 표현했다. 전국 13개 시도에서 60명 안팎의 등록 선수가 활동하는 비인기 종목에서 기대하기 힘든 잠재력을 지녔다는 의미다. 등장부터 화려했다. 줄곧 수영 선수로 활동하다 지난해 말 트라이애슬론으로 전향했는데 올해 7월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국 트라이애슬론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다.

 트라이애슬론 세 종목 중 수영은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고, 사이클은 상대 선수 견제와 체력 안배가 중요하다. 승부는 대개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에서 가려진다. 그런 점에서 정혜림은 철인의 피를 타고났다. 수영의 기본기를 잘 닦은 데다 육상 선수 출신인 이모들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지난 2월 열린 시·군대항 역전경주대회에 출전한 정혜림은 여자 육상 중장거리 고교 최강 박영선(17)보다 빠른 기록을 내 대회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26일 경기 직후 만난 정혜림은 “솔직히 나도 이 종목에 이렇게 빨리 적응할 줄 몰랐다”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을 봐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트라이애슬론에 관심이 있어서 그저 훈련만 열심히 했다”고 말한 그는 “다이내믹하고 스피디한 스포츠라 지는 것과 느린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나에게 꼭 맞는다”고 말했다.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을 더해 탄생한 ‘철인’이지만 아직까지는 ‘소녀’다. 정혜림은 ‘대회를 마친 뒤 꼭 하고 싶은 것’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좋아하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맘껏 먹어보고 싶고, 친구들과 서울 구경도 가보고 싶다. 남산 타워가 그렇게 좋다던데…”라며 활짝 웃었다.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하는데 브로콜리는 죽을 만큼 싫다”고 말할 땐 영락없는 15살 여중생이었다.

 이제 정혜림의 시선은 브라질을 향한다.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을 다음 목표로 정했다. 한국 선수들 중 올림픽 무대를 밟은 선수는 허민호(2012 런던 올림픽)가 유일하다. 정혜림은 “혼성단체전이 올림픽 종목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다”면서 “브라질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뤄보고 싶다. 하루 빨리 어른이 돼 개인전도 뛰고 싶다”고 말했다. 철인3종경기 개인전은 수영 1.5㎞·사이클 40㎞·마라톤 10㎞를 합쳐 총 51.5㎞(올림픽 코스 기준)를 달린다. 체력 소모가 극심해 성장기인 18세 미만의 선수는 출전할 수 없다.

인천=송지훈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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