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국의 그린스펀은 왜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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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해 가을 어느 상가(喪家)에 조문을 갔다가 우연히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본 적이 있다. 후보 단일화 직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정몽준 후보도 그 상가를 찾았었다.

그런데 鄭후보는 잠시 있다 자리를 떴으나, 盧후보는 문상객 틈에 끼어 앉은 뒤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각종 개혁과제를 놓고 몇십분간 쉬지 않고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으면서 "참 열정적"이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꼭 스무살이 젊다. 젊은 대통령답게 일도 아주 의욕적으로 하는 것 같다. 대통령의 발언이 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국정홍보처는 최근 '요즘 많이 궁금하시죠'라는 책을 펴냈다. 盧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23일부터 올 3월 17일까지 각종 회의와 행사에 참석해 언급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1백30여쪽에 달하는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주제도 다양하다. 석달간의 발언을 모아 책 한권이 나왔으니 만약 이런 템포가 이어진다면 5년 재임 기간 중 이런 책이 20권쯤 나올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칭찬도, 비판도 많이 나온다. 특히 외교.노사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생각을 털어놓기 때문에 대통령의 발언은 찬반 토론을 벌이기에 딱 좋은 소재가 된다. 이 때문인지 어느 모임에서든 대통령 이야기가 한두가지는 화제로 등장한다.

'국민 곁으로 다가서는 대통령'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대통령이 워낙 '스타'가 되다 보니 그 밑의 사람들은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요한 사항들은 대통령이 정리를 하니 어느 결에 대통령만 쳐다 보는 풍토가 생겨났다. 대통령이 기업인도, 노조 인사도 만나고 평검사와 대화도 하는 것을 보면서 기대심리가 높아져 누구든지 대통령과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요즘 "조마조마하다"는 말도 많다. 일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할 확률도 높아질 텐데, 대통령의 실수는 커버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대통령이 이번주 초 "대통령의 방향 제시나 감독업무를 줄이려 한다"며 "부처 업무는 장관이 하고, 정부 업무는 총리가 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장관책임제'를 확실히 정착시키려면 무엇보다 장관들을 스타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이 만날 사람을 장관이 만나도록 하고, 대통령은 대신 장관들을 자주 독대(獨對)했으면 한다.

위원회.기획단.TF팀 등 이름도 생소한 기구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는데 이런 기구가 하는 일도 소관부처 장관이 중심이 됐으면 한다.

가급적 권한을 밑으로 위임해 대통령같이 권위있는 장관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공직자들의 사기가 펄펄 살아날 것이다. '힘 있는 장관'을 만드는 방안을 특별히 연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기 보장도 중요하다. 검찰총장.금감위원장.공정위원장 등 많은 임기직 공직자가 새 정부 출범 후 바뀌었다. 지난주엔 산업은행 총재도 임기 1년을 남기고 전격 교체됐다.

"새 정부와 코드가 맞아야 한다" "정부가 바뀌면 재신임을 묻는 게 당연하다"는 설명이 있었으나 그러려면 애당초 "임기를 존중하겠다"는 말은 안하는 게 나았을 듯 싶다.

미국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아직 임기가 1년 남았는데도 최근 부시대통령이 연임을 보장한다고 했다. 1987년부터 정권을 바꿔가면서 네차례 연임 중인 그린스펀을 부러워하는 공직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다.

민병관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