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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시아계 뭉쳐 할리우드에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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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작지만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30만달러(약 3억6천만원)를 들인 초저예산 영화 '베터 럭 투모로(Better Luck Tomorrow)'가 돌풍을 일으켰다.

2주 전 뉴욕.로스앤젤레스의 13개 극장에서 선보이며 박스 오피스 24위에 올랐던 이 영화는 지난주 스크린 수가 42곳으로 늘어나며 흥행 순위도 두 계단 올라갔다.

25일엔 미국 전역 4백여 극장에서 확대 개봉된다. 개봉 첫주 스크린당 평균 수입은 3만달러(3천6백만원)로 1위, 전체 흥행도 이미 제작비의 세 배를 넘어섰다.

더 놀라운 건 '베터 럭 투모로'가 아시아계 미국 젊은이의 현실을 정면에서 다룬 첫 영화라는 점. 그간 미국에서 성실.근면의 대명사로 통했던 동양인의 어두운 구석을 조명했다.

한국.중국 등 동양계 출신의 감독.배우들이 합심해 할리우드의 높은 문턱에 도전한 작품이란 의미도 만만치 않다.

로스앤젤레스 포시즌 호텔에서 만난 '베터 럭 투모로'의 주연 배우 성강(본명 강성호.30)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지난해 미국 독립영화 최대 축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후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기대하긴 했지만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워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죽기 살기로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실패하면 더 이상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감독.배우가 설 자리는 없다, 즉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죠. 아시아인은 언제까지 일과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져야 합니까. 또 영화에선 언제까지 무술에 능통하거나, 허드렛일만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까."

그는 '베터 럭 투모로'를 미국 내 아시아계 영화의 '기공식'(groundbreaking)으로 비유했다. 동양인이 주체가 돼 배우로서,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할리우드에 알린 신호탄이라는 뜻에서다.

이젠 할리우드의 중요한 자산이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화처럼 제2, 제3의 아시아계 영화가 나오는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했다.

대만 출신의 저스틴 리 감독이 연출한 '베터 럭 투모로'는 캘리포니아주 남부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아시아계 청춘의 명암을 보여준다. '성적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는 고교생 네 명이 주인공이다.

집안이 부유하고, 성적이 우수하고, 운동 실력도 뛰어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들이 학업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약.살인 등 범죄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힙합풍의 경쾌한 화면에 옮겨놓았다.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이버트 같은 저명 평론가는 "현대 미국 젊은이에 대한 고통스럽고도 능란한 우화"라고 평하며 별 네 개 만점을 주기도 했다. 다른 학생의 숙제를 대신하고, 시험 답안지도 돌리며 돈을 챙기는 한(Han)을 연기한 성강에 대해선 '유능하고, 재주 많은 배우'라고 칭찬했다.

성강은 세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건너왔다. 이번이 다섯 번째 영화다.

'진주만'에서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미군 병사, 다음달 16일 국내 개봉할 '앤트원 피셔'에서 정신과의사 덴절 워싱턴의 조수 등 주로 단역을 맡았다.

"감독은 트럭을 팔고, 신용카드를 열개나 돌리며 영화를 완성했어요. 모든 배우.스태프도 개런티 없이 참여했습니다. 저도 프로듀서로 나서 제작비를 조금이나마 조달했지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할리우드가 동양계에 절대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여태껏 개인이 아닌 집단, 그것도 공산품처럼 상자째로, 혹은 상표(레이블)로 간주됐던 동양인에 대한 고정 관념(스테레오 타이프)을 허문 게 가장 큰 소득입니다. 교포 한분이 영화를 보고 '이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하실 땐 눈물이 핑 돌았어요. 아시아계도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는 동양계가 주인공이지만 성적과 출세에 짓눌린 모든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만든 게 성공 요인 같다고 덧붙였다. 피부색을 초월한 보편적 고민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제작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도 다음달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된다. 전 세계 배급은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가 맡았다.

로스앤젤레스=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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