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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분할·부부강간 … 생활밀착형 판결 두드러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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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양승태 대법원장

“국민의 신뢰 확보는 사법부의 변함없는 염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25일 취임식에서 이렇게 밝혔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국민 신뢰 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취임 일성으로 천명한 것이다. 그는 방법론으로 소통 강화와 전원합의체 활성화 등을 제시했다. 그 후 3년 ‘양승태 코트(court·법원)’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이끌었던 대법원과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두 대법원장 시기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분석한 결과 무게중심이 ‘정치사회형’에서 ‘생활중심형’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 대법원장 취임 후 전원합의체에 넘겨진 사건은 총 59건. 41건이었던 이 전 대법원장의 초기 3년(2005년 9월~2008년 8월)보다 늘어난 수치다. 기존 판례를 바꾼 경우도 29건으로 이 전 대법원장 때(24건)보다 많았다. 신현윤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국민들의 관심이 많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건에 대해 대법관 전원이 참여해 결론을 내는 전원합의체 판결의 증가는 긍정적”이라며 “시대 변화에 맞춰 과거 판례를 보다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건 유형도 과거와 달라졌다. 민사사건이 40.7%로 이 전 대법원장 때(29.2%)보다 비중이 커진 반면 형사사건은 16.9%로 과거(31.7%)보다 줄었다. 이 전 대법원장 때는 한 건도 없었던 이혼소송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도 3건 나왔다. 사건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다. 이 전 대법원장 때는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 방북을 둘러싼 국가보안법 사건과 PD수첩 광우병 보도 관련 명예훼손 사건 등 정치·사회적 이슈들이 주로 다뤄졌다. 양 대법원장 체제로 바뀐 뒤에는 ‘생활밀착형’ 사건들이 두드러진다.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지난해 5월 판결은 43년 만의 판례 변경이었다.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요시하는 최근 국민의 법감정을 감안한 판결이다. ‘이혼 시 장래에 받을 퇴직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이 된다’는 올 7월 판결도 19년 만에 판례를 바꾼 것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연금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혼할 때 재산이 아닌 빚은 나눌 수 없다’는 1997년 판례는 지난해 6월 ‘빚도 나눌 수 있다’로 바뀌었다. 2012년 6월에는 법정 급여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임의 비급여’ 진료행위를 모두 부당하다고 본 판례를 환자 치료에 필요한 경우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쪽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비판적 시각도 적지 않다. 이달 초 임기를 마친 양창수 전 대법관 후임으로 권순일 대법관이 취임하면서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이 모두 판사 출신으로 구성됐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 11명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데다 학계·검찰 출신이 없어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기 힘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반대 의견이나 별개 의견이 나오는 비율이 이 전 대법원장 때에 비해 줄었다는 평가도 있다. 박갑주 변호사는 “법원이 이 전 대법원장 시절에 비해 보수화돼 가고 있는 느낌”이라며 “정치적으로 예민한 판결을 일부러 비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지적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통상임금이나 키코사건 등 노동·기업사건에서 사회적 약자보다 기득권층의 입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대법원의 획일적 구성에 따른 한계라고 본다”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남은 임기 3년간의 과제로 상고심 개편과 법조일원화의 안정적 정착 등이 꼽히고 있다. 류여해 사법교육원 교수는 “국민의 믿음을 얻기 위해선 더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근본적 대안들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제·이유정·노진호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와 달리 대법원장을 포함해 13명의 대법관(법원행정처장 제외) 전원이 참여하는 대법원의 재판 절차. 소부에 속한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 대법원 판례를 바꿀 필요가 있을 때 열린다. 다수의견이 판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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