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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대통령에 책임 물을 수밖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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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논설위원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무슨 일이든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게 일상처럼 됐는데,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쪽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만기친람이라도 모든 일에 간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KB금융 사태는 다르다.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금융판 막장드라마’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KB금융 사태는 각기 다른 줄을 타고 온 낙하산 회장·행장 간의 이전투구가 본질이다. 거기에 낙하산을 막기는커녕 방조했다가 뒤늦게 끼어들어 망신을 자초한 금융감독 당국이 조연이다. 바꿔 말하면 애초 낙하산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 것이다. 그럼 KB금융에 낙하산을 낙점한 이는 누군가.

 여러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을 최종 낙점한 건 청와대다. 대통령의 뜻이 작용했다는 얘기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대통령이 교통정리를 했다고 한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금융 ‘4대 천왕’이 한국 금융을 20년 후퇴시켰다는 비난을 받은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낙하산의 폐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새 잊었단 말인가.

 잠시 복기해보자. 우리 국민은 17년 전 외환위기 때 관치금융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망가진 금융을 살리기 위해 피 같은 돈 168조원을 쏟아부었다. 수만 명의 실업자가 쏟아졌고 산업은 쑥대밭이 됐다. 금융이 망가지면 산업이, 나라가 망가진다는 교훈을 온 몸으로 배운 것이다. “다시는 은행을 망하게 하지 말자”며 부실은행에 국민 돈을 넣고 인수·합병을 통해 은행 덩치를 키웠다.

 처음 몇 년은 좋았다. 기사회생한 은행들은 한 해 수조원씩 이득을 냈다. 하지만 곧 내리막이 왔다. 한국 경제의 엔진이 식어가자 금융도 덩달아 식어간 게 큰 이유다. 고질적인 망각병이 하필 이때 도졌다. 노무현 땐 찔끔이던 낙하산이 MB땐 무더기로 쏟아졌다. KB금융처럼 주인 없는 은행에까지 주인행세를 했다. 수억~수십억원의 연봉, 높은 복지혜택에 눈이 먼 것이다. 은행을 살리기 위해 온 국민이 어떤 고통을 참아냈는지 까맣게 잊은 것이다. 줄서기와 눈치 보기, 보신주의가 종합선물세트처럼 따라왔다. A은행장은 “MB는 금융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전리품처럼 나눠줬다. 인맥·학연에 따라 무자격자, 금융 문외한까지 CEO 자리에 앉히면서 한국 금융의 후퇴를 부채질했다. 최대 피해자가 KB금융이었다”고 말했다.

 이 정부는 어떤까. 흉보면서 닮는다는 옛말 그대로다. 박 대통령의 싱크 탱크, 대선 캠프 출신 인사들이 금융기관에 줄줄이 입성했다. 지난해 산은금융지주 회장을 꿰찬 홍기택 전 중앙대 교수는 금융 경력이 전혀 없다.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과 대통령직 인수위원 출신으로 스스로 “나는 낙하산”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정책금융을 진두지휘해야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엔 자회사인 KDB 대우증권 사장을 임기를 몇 달 남기고 퇴진시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후임엔 청와대 내정설이 도는 인사가 유력하다고 한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다 낙하산 출신 CEO의 업보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 3월 수출입은행장에 취임한 이덕훈은 박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금융 인맥의 핵심인물이다. 이달 초엔 5개월간 공석이던 수출입은행 감사 자리마저 박근혜 대선 캠프 출신의 공명재 계명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그는 금융은 물론 감사직에 적합한 경력이 없다.

 여기까지는 다 지난 일이라 치자.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곧 KB금융의 새 회장을 뽑아야 한다. 벌써 여럿이 뛴다는데 유력 후보자들이 꼭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누가 낙점됐답니까?”다. KB금융은 지난 10년을 ‘낙하산→경영 분쟁→도로 낙하산’의 사슬에서 쳇바퀴 돌 듯했다. 이번에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KB금융엔 미래가 없다. 그건 한국 금융의 미래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땐 정말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