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과학기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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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때르릉, 때르릉­.
오늘따라 유난히도 전화벨이 자주 올린다. 모처럼 독서를 해 보려고 잔뜩 다짐을 하고 있는 나에게 계속 잘못 걸려오는 전화는 짜증스럽기만 하다. 자연히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여보세요. 몇 번에 거셨어요? 좀 똑똑히 거세요.』­탁­.
이쯤 되면 전화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때르릉­또 전화벨이 울린다.
『아니, 누구 약을 올리고 있나. 어디 두고 보자. 여보세요.』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나의 귀에, 『나야, 영주야. 나 누군지 알겠니? 추자야, 구추자.』
8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친구의 목소리였다. 학창시절 단 하루만이라도 못보면 안달을 하던 우리들, 강의가 끝나고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는 차마 헤어지지 못해 학교에서 가까운 우리 집까지 걸어왔다가는 다시 내가 그 친구를 바래다준다고 몇 정류장을 걸어다니던 떡고물친구.
4학년 마지막 졸업시험을 치르고 학교 잔디밭에 앉아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앞날을 얘기할 때 그 친구는『난 결심했어. 평범한 여자의 길은 싫어. 난 이 땅에 없어서는 안될 심지 깊은 여자가 되겠어』라고 얘기했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벽지교사를 자원해 어디론가 간 뒤 편지 한장 없었던 것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그 친구가 생각나서 집으로 전화를 해도 집에서도 소식을 몰라했고 얼마 후 그 댁도 딴 곳으로 이사를 해서 정말 연락할 길이 끊겨 이젠 내게선 잊혀진 사람이 되었던 그 친구가 이 가을에 나타난 것이다. 이름 그대로.
친정에서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지금 우리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위치를 자세히 일러주고 난 뒤 난 마음이 들떠 한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8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던 내가 갑자기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의 속이란 변덕스럽기도 하구나.」이런 저런 생각으로 서성거리는데 벨소리가 났다. 급히 문을 연 내 눈에 등 뒤에 하나
가슴에 하나,
양 옆에 하나씩.
따로 하나 늘어선 아이들이 보였다. 정확히 다섯이었다. 두눈이 휘둥그래진 내게 그 친구는 천연덕스럽게『모두 우리 애들이야』라고 했다.
『아니, 평범한 여자의 길은 가지 않겠다던 네가 이 애들이 모두 웬말이니?』놀라서 묻는 내게 그 친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요즈음 세상에 연년생으로 다섯을 낳은 내가 네 눈에는 평범한 여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자 너희들 모두 이 아줌마에게 경롓.』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일제히 이마에 손을 앉는 아이들을 따라 나도 얼떨결에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박영주 <서울 성북구 동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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