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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0)제75화 패션 50년(2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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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성들도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도록 기술교육을 해보겠다는 소녀적의 꿈에다 30년 가까이 복식업에 종사하면서 양재기술자들의 딱한 처지를 보는 동안 느낀 것은 양재학원을 다시 세워, 수준 높은 디자이너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우회 회원들과의 일본양장계 시찰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학원 재설립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국제양장점이 자신의 단골집이라고 하면 본인을 갈 모르는 이들에게 조차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신분에 있고 멋을 알고 옷입을 줄 아는 여성으로 인정될 만큼 국제의 상점은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다.
따라서 한참 성업중인 양장점을 포기하면서까지 구태여 학원을 차리려는 나에게 정색을 하고 말리거나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걱정해주는 친지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복장계가 바로 되고 발전하려면 기초학력과 전문지식을 고루 갖춘 고급인력을 길러내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나의 굳은 결심을 그 누구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도해서 6년 동안 운영해온 국제양장사를 60년말 현루크양장점 주인 서정순씨에게 넘기고 학원개설을 서둘렀다.
계성여고앞 전조폐공사 자리에 국제복장학원의 문을 연것은 61년3월1 세 번째 여는 학원이지만 현판식에서 간판을 걸던 매의 벅찬 감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집 대상자를 굳이 대학졸업 및 고교 졸업이상으로 못박았던 것은 학식과 실력을 고루 갖춘 인재들을 배출해 내는 것만이 디자이너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나름대로의 판만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때의 이러한 생각이 정념 옳은 것이었다는데 지금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국제복장학원의 자랑거리라면 한국 최초로 스타일화과를 개설했다는 점이다.
요즈음은 각 대학의 의상학과나 다른 양재학원에서도 모두 스타일화를 기본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60년대초까지의 우리나라 양재교육이라면 옷감을 말라서 바느질하는 법외에는 색채학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내가 공부하던 무렵에는 일본에도 스타일화 과목은 없었지만 60년도 해외여행에서 선진국의 복식계를 살펴보는 동안 복장교육의 한 과정으로서 스타일화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집을 지으려면 제일 먼저 완전한 설계도가 필요하듯 의상에서도 재단과 재봉 이전에 스타일화라는 설계단계가 꼭 필요한 까닭이었다.
한국 최초로 스타일화를 맡아 지도하신 분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서양화가 김종하 화백이었다. 김화백은 의상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은 분으로 나의 청을 쾌히 받아들여 스타일화과를 맡아 주셨는데 우리 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하신지 얼마후부터 이대가정학과등 각 대학에도 스타일화 강의를 맡아 출강하는등 의상디자인 교육에 큰 공헌을 하셨다.
제1회 졸업생은 15명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지금 한국패션계의 중진으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데 이용렬·문경희·박정일 ·김부미·최현숙·강귀희·최보초·이수지·앙드레김·조세핀조 등이 있다.
이들 중 특히 앙드레김씨는 내가 양장점을 하고 있을 때 자원해서 나를 도와준 청년으로 양재를 전문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의상에 대한 쎈스가 있고 매너가 상냥해서 고객들에게 사람을 받았다.
양장점 문을 닫을 때 앞일을 의논해온 김씨에게 복장학원 진학을 적극 권유한 것이 오늘날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있게 된 계기인 셈이다. <계속> 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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