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트」없는 이집트와 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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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다트」이집트대통령의 불의의 서거로 중동의 정치지도를 고쳐 그려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불안정한대로 캠프데이비드협정을 토대로 아랍-이스라엘간 평화가·명맥을 이어온 것은 「사다트」가 누린 카리스마에 힘입은 바가 컸던 것이다.
79년3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체결된것은 48년의 팔레스타인전쟁이래 3O년간 계속된 전쟁상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다트」의 정치생명을 건 역사적인 도박이기도 했다.
「사다트」는 일단 도박에서 이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도박의 여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쓰러뜨린 총격은 어쩌면 중동사태를 「사다트」의 도박 이전보다 혼란스럽게 만들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사다트」의 대이스라엘 전독강화의 용단을 환영하던 서방세계는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사다트」가 도박에 쓸어넣은「판돈」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추방되고 이연맹의 22개회원국중 온건파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포함한 18개국으로부터 외교관계를 단절당했다.
이집트는 42개국의 이슬람외상회의에서도 자격정지를 당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의 댓가로 아랍세계에서 고립의 구석으로 떠밀려나야했다.
각오는 했었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운 사태는 페르시아만안의 아랍산유국들이 이집트에 경제윈초를 끊어버린 일이다.
73년 10월전쟁 이후 이집트가 아랍산유국에서 받은 경제윈조가 1백3O억달러가 되는데 그게 한꺼번에 끊겨버렸으니 이집트경제가 받은 타격은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다행히 이스라엘로부터 돌려받은 시나이반도의 유전이 금싸라기같은 석유를 뿜어내고, 현금으로 말하더라도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주선하고 환영한 미국과 유럽의 일부 선진국들이 사다트체제의 안정을 위해 5년간 1백50억달러 정도의 경제윈조를 제공하기로 되어 경제적으로는 「흑자」를 낸셈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사방에 적이었다. 시리아, 리비아, PLO는 아랍권전체를 반「사다트」로 결속시키는데 성공하여 미국의 적극 지원 없이는 정권유지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국내사정은 더욱 긴장되어갔다. 국내의 반「사다트」세력은 지식인을 중심으로한 좌익정치세력과 이슬람원리주의를 주장하는 종교세력으로 대별되어 왔는데 대이스라엘 평화조약직후 이 양대세력은「연합국민전선」으로 뭉쳐버렸다.
「사다트」의 옛 혁명동지들이 대거 거기에 참여하고, 연률30%의 인플레까지 합세하여 80년년봄부터는 대학생들의 반「사다트」데모가 쉴새없이 일어났다.
「사다트」는 작년5월 수상을 겸직하는 친정체제를 출범시키면서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번영을 위한 투쟁」이라는 트럼핏을 높이 불었지만 기대와 현실간의 깊은 갭에서 생기는 국민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제 이집트의 장래와 중동정세의 장래는 불투명하기 짝이없다. 「무바라크」부통령이 얼마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혼란을 수습할 것인지 불안하고 궁금하다.
최대의 우방, 중동정책의 교두보를 잃은 미국은 「레이건」행정부의 계획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조기공중경보기(AWACS)를 제공하여 사우디아라비아를 친서방으로 붙들어 두는일이 과거 어느때보다 절실해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이스라엘에 가능한 압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팔레스타인 민족국가의 건설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고향을 돌려주지 않고 중동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바랄수 없다는것은 캠프데이비드협정이래 세계여론이 거듭 경고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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