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한잡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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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 곳은 제설작업을 하지 않으므로 이 길을 걷다가 다치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손해배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이상한 글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시립공원 한구석에 서있는 펫말에 씌어진 공고문이다.
눈이 내릴 경우 제설작업을 하지 않는 길이므로 알아서 다니라는 뜻이다.
또 이 공고문에는 재설을 해야 마땅한 대로가 관리 소홀로 통행인에게 손상을 입혔을 때에는 국가가 그 책임을 진다는 함축도 들어있다. 나라가 한 개인에게 이처럼 배려를 해줄
때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들은 어떠한가. 우리들에게는 과거 강요된 애국심이나 애향심이 있었을 뿐이며 겉만의 공동의식이 강조되었을 뿐이다. 소박한 애국심을 탓할 바는 아니나 주고받는 것이 없는,
일방적인 사랑은 쉽게 식기 마련이다. 국가가 개인에 대하여 일방적인 희생만을 요구하고 그것이 거듭되다가는 양쪽이 다같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크나 큰 재난으로 국가가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극한상황에 이르렀을 때 아무래도 소박한 애국심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매달 방범비·청소비를 부담하며 각종 세금을 낸다. 이런 돈을 낼 때 무언가 서글픈 심사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산과 물을 다스려 천재를 예방하는 일이나 도둑을 막아 서민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밤잠을 자게하는 일, 외적의 침입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일. 이 모든 일들은 국가가 행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일이어서 원시 야경국가의 형태에서나 이런 일로 만족했었다.
정부는 앞으로 국민복지에 정책의 중점을 두겠다고 한다. 우리의 국력이 이제야 거기에까지 눈을 들리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나라의
손길이 여린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 두루두루 미칠때 나라 소중함이 뼈에 사무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라가 재산을 요구할 때는 재산을, 힘을 요구할 때는 힘을, 목숨을 요구할 때는 기꺼이 그것까지 내놓게 된다. 거기에서 받은 것이므로 그리로 돌리는데 억울할 것이 없다.
흔히 충과 효는 절대적이라 하지만 절대적이란 생각만으로는 나라가 지탱되기 어렵다. 어떠한 형태의 사람이든 사람은 상대적이며 인간의 속성은 그 근본에 있어 이기를 추구하는데
있다.
때문에 우리의 복지정책도 국민개개인에게 끊임없이 빚을 지우고 그것이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라도 되받아 쓰는 비축의 지혜를 실천하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리고 이런 빚은 골고루 지우는 것이 좋다. 이 빚처럼 의식이 확실하게 되돌아오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설사 돌아오지 않는다고크게 대수이겠는가.

<약력>1938년 충북제천출생 ▲서울대문리대독문과졸 ▲빈대학수학 ▲현 한양대독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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