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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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 젊은 교수가「A·토인비」에게 물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합니까?』
팔순의 노사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사람이 사는 목적이란 사랑하고 예지를 활용해 창조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이 세가지 목적을 위해 모든 능력과 저력을 바쳐야만 됩니다.』
1971년 옥스퍼드대학간『미래에 산다』(Surviving the Future)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토인비」박사는 이 대화 끝에 이런 충고도 잊지 않았다.
『사람은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할 수 있는 한, 그에게는 고통과 슬픔이 따른다고 해도 육체적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뜻있는 일이에요.』
「사랑」과「예지」와「창조」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아껴야한다는 말도 된다.
「토인비」박사의 충고는 인간이 고통속에서도 왜 살아야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는 태양·바람·공기·달·별·지구 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인간의 사랑을 받아야할 형제이며 자매라는 성「프란시스코」를 존경한다고 했다.
인간의「안락사」가 합당하냐, 안하냐의 논란도 그 궁극적인 기준은 사랑의 능력이 남아있느냐, 없느냐에서 찾아야 할것같다. 사실 이것은 법이나, 논리로 판가름할 일은 아닌 것이다. 초자연만이 최후의 판결자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에는 엄연히 그런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안락사란 원래 법률용어다. 독일어로는 오이라나지(Euthanasie)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편안한(eu-) 죽음(thanatos)이라는 뜻이다.
1976년 미국 뉴저지주의 최고재판소는 22세의 처녀「퀼런」양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냈다. 뇌기능의 손상으로 1년동안 가사상태에 있는 이 환자에게 그의 부모는 안락사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바로 당사자의 은밀한 의식은 누구도 모른다. 의학의 손이 미치지않는 인간생명의 신비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바깥세계의 사람들이 임의로 판정하는 것은 적어도 당사자에겐 안락이 아닐수도 있다.
이웃 일본에선 지난 77년부터 안락사운동이 번진 일이 있었다. 생자들이 여차하면 안락사시켜도 좋다는『나의 의지표명서』를 그 운동협회에 미리 맡겨놓은 것이다.
여기엔 조건이 있었다. ①암으로 고통이 심할 때②회복불능의 의식불명③6개월 이상의 의식불명④원상회복불능의 신비적 무능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런 판정을 누가 하느냐다. 물론 의사가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사는 초능력자도 신도 아니다.
어느 유명인의 안락사와 그 결정인의 동반자살은 새삼 삶의 뜻을 새겨보게 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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