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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명나라도 알아준 조선 3대 문장가 … 차로 세상과 소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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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26면

차와 함께 무심 태평한 삶을 즐기는 조선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전다한화(煎茶閑話)’ [간송미술관 소장]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1410~1481)은 조선의 3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특히 시문에 뛰어났던 그는 조선 초 차 애호가였던 태재 유병선(太齋 柳方善1388~1443)의 제자로 수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그의 자는 문량(文良)이며 괴애(乖崖)와 식우(拭疣)라는 호를 썼다. 비교적 평탄했던 그의 환로(宦路·벼슬)는 세조 때에 더욱 빛을 발한다.

<13> 괴애 김수온

당시 간경도감을 설치, 불경 간행에 힘썼던 세조는 괴애처럼 불경에 능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명나라로 보내 범자(梵字)를 구해 오게 하였으니, 이는 세조가 그에게 보여줬던 신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괴애의 형 신미(信眉)대사를 존경했기에 이들의 불연(佛緣)은 숙연(宿緣)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그는 제자백가 뿐 아니라 육경(六經)에도 능했던 인물이라 전해지고 세종의 명을 받아 의서(醫書)인 『의방유취』를 편찬했던 전력도 있다.

당시 그의 글 솜씨는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파다하게 퍼졌는데, 이는 사신 진감(陳鑑)의 ‘희정부(喜晴賦)’에 화답하는 시 한 수 때문이었다. 이후 사신으로 명나라를 찾은 그에게 보인 명나라 관료와 문인들의 환대는 서로 앞 다투며 ‘이 사람이 바로 (진감의) ‘희청부’에 화답한 사람이다’라고 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후일 장유(張維1587~1638)는 『간이당집(簡易堂集)』서문에서 “국조(國朝·조선)의 문장은 비교적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오직 점필 김종직(佔畢 金宗直)),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 허백 성현(虛白 成俔)) 등 서너 분의 공(功)이 대가(大家)의 대열에 끼인다고 일컬어져 올 뿐이다.”라고 평가하여 그의 문재(文才)를 길이 칭송하였다.

신숙주 책 빌려가 방에다 찢어 붙여
그럼 그의 출중한 문학적 소양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천출(天出)로 타고 난 재주였을까. 아니면 독서괴벽(讀書怪癖)이 만든 탁마(琢磨)의 결과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의 「김수온졸기(金守溫卒記)」에 의하면 그는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뛰어났다”고 하였고 그의 형인 신미대사가 출가하기 전부터 이미 집현전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따라서 그의 문학성은 천출(天出)로 타고 난 것이며, 태생적인 집안 환경과 특이한 그의 독서법에서 연유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그가 문재를 탁마했던 기이한 독서법은 기행에 가까운 일화를 남겼는데, 그의 독서법은 아주 독특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바로 책을 찢어 소매에 넣고 다니며 외우다가 외운 책은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니 책을 소중히 여겼던 당시의 풍속에서는 용인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로 그의 천재성과 괴벽(怪癖)은 신숙주와 관련된 고사(古事)에서 백미(白眉)중에 백미를 보여준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신숙주(申叔舟·1417~1475)에게 귀한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괴애는 신숙주를 찾아가 책을 빌려달라고 간청한다.

평소 그의 괴벽을 알고 있었던 신숙주였기에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하지만 그냥 물러설 괴애가 아니었다. 거듭 책을 빌려달라고 조르자 할 수 없이 책을 빌려 주고 만다.

이제나 저제나 빌려간 책을 돌려주기를 기다렸지만 수일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자 신숙주는 괴애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신숙주가 애지중지했던 책은 여기저기 찢겨져 벽에 붙어 있었다. 놀란 신숙주가 ‘이게 무슨 짓인가’라고 화를 내자 괴애는 ‘이렇게 하면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고 앉거나 서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귀한 책을 잃은 신숙주가 이 일로 괴애와 절교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지 않으니 이 고사는 옛사람의 벗에 대한 포용력과 괴애의 무심(無心)을 함께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괴애는 한번 책에 빠지면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고 하니 실로 그의 빼어난 글 솜씨는 독서에서 완성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청빈한 삶을 살았던 자취는 ‘실제(失題)’라는 시에도 또렷이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입이 마를 때 마다 다만 차로 (입을) 적시고(枯吻時時只點茶)
창자를 지탱해 주는 보리밥 한낮에야 먹는다네(撑腸麥飯午交加)
뼈에 사무치는 청빈함 아직도 옛날과 같으니(淸貧徹骨猶依舊)
높은 벼슬(候)에 봉해진 부원군의 집이라 말하지 마오(莫道封候府院家)
『식우집(拭疣集)』 권4

그가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것은 성종 2년(1471)이다.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뼈에 사무치는 청빈함 아직도 옛날과 같다”는 것이다. 점심이 되어야 보리밥으로 배를 채울 수 있고, 마른 입은 차로 적시던 삶이다. 그러므로 “높은 벼슬에 봉해진 부원군의 집이라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탐욕을 멀리한 삶의 일단(一段)을 드러난다.

아울러 그의 불교적 사유는 그의 시 ‘제산수병(題山水屛)’에 다음과 같이 언급됐다.

산과 물을 그려낸 솜씨, 모두 귀신 같아서(描山描水摠如神)
모든 풀과 꽃들이 절로 봄을 만났구나(萬草千花各自春)
결국 봄날의 아름다운 경관도 모두 환상일 뿐(畢竟一場皆幻境)
그대나 나 또한 참이 아님을 누가 알리오(誰知君我亦非眞)
『식우집(拭疣集)』 권4

산수의 아름다움은 자연 질서의 중화(中和)다. 봄이 되자 풀과 꽃이 절로 형형색색의 물형(物形)을 이룬 세계, 이는 살기 좋은 낙토(樂土)라 여길 것이다. 물상의 형색(形色)은 때가 되어야 절로 드러낸다. 그러나 괴애는 이러한 현상을 “모두 환상일 뿐”이라 하였다. 이는 『금강경』의 일대사인 공(空)사상을 나타낸 말이다. 그래서 “그대나 나 또한 참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모든 현상은 사라지고 마는 환몽이므로. 괴애는 이 법도를 알려주고자 한 것이리라. 한때 세조의 명으로 『금강경』을 번역했던 그의 실력은 이 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차 나눌 손님 기다리며 사립문 열어놔
불가의 원용을 고스란히 드러낸 ‘송월헌(松月軒)’은 그의 담백한 시의 골기(骨氣)를 나타냈다.

소나무와 달은 승가의 풍경이고(有松有月僧家境)
미혹과 참(眞)을 버림이 불가의 원융이라네(離妄離眞佛意圓)
일단의 소식처를 말하려 하지만(欲說箇中消息處)
스님께서 잠잠하니 내 할 말을 잊었네(上人無語我忘言)
『식우집(拭疣集)』 권4

소나무는 곧은 선비의 기상을 상징한다. 달 또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소나무와 달을 승가의 풍경이라 한 뜻은 무엇일까? 그 의미가 심장한 듯하다. 더구나 그는 시쳇말로 한 소식을 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자신이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바로 “미혹과 참(眞)을 버림이 불가의 원융이”라는 말에서 드러냈다.

하지만 “일단의 소식처를 말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수행이 높은 승려는 ”잠잠하니 내 할 말을 잊었다”는 것이다. 그와 교유했던 승려는 이미 괴애의 입지처(立地處)를 짐작했을 터이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경지란 이런 것이다. 특히 고요한 사원의 선미(禪味)는 소나무와 달로 풍광의 운치와 상징을 더했으니 조선의 문장가로 이름을 드날렸던 그의 재주는 이런 대목에서 빛난다.

차를 즐기며 한가한 여유를 즐긴 그의 일상은 ‘사풍기공견방(謝豊基公見訪)’에서도 엿볼 수 있다.

늘그막에 관직이 한가하여 누추한 집에 누었더니(垂老官閑臥弊盧)
차 그릇과 또 술잔이 남아 있구나(茶甌兼復酒樽餘)
세상 사람에게 사립문을 닫지 않고(衡門不向世人設)
높은 의자는 다만 아름다운 객을 위해 청소했네(高榻只爲佳客除)
고요함 속에 이리저리 석노를 탐구하고(靜裏沿洄探釋老)
한가한 중에 담소하며 시서를 담론하네(閑中談笑駁詩書)
은근히 다시 백련의 모임을 약속하고(殷勤更約白蓮會)
한 해가 저물 때 서로 좇아 모임을 맺으리(歲宴相從結社居)
『식우집(拭疣集)』 권4

그의 무변(無邊)의 포용력은 “세상 사람에게 사립문을 닫지 않은”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뜻을 나누고 차를 함께 할 아름다운 객을 기다리며 높은 의자를 준비해 두었다 하니 이는 고상한 이상을 함께 할 이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그의 학문은 육경(六經)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노자와 불경을 탁마하고, 서로 담소하며 나눈 이야기는 시와 서였으니 사방으로 터진 그의 물리(物理)는 사람들을 모이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날이 저물면 “은근히 다시 백련의 모임을 약속”한다는 것이니 삶의 태평(泰平)은 자신의 안목으로 구현하는 세계임이 분명하다.

한편 조선 초기 왕실에서는 차를 퇴출시켰지만 차를 파는 가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는 그의 시 ‘차등계시권운(次登階詩卷韻)’에 “차는 멀리 시장의 다리 근처에서 사오고(茶因遠市橋邊買)/ 시는 깊은 교제 자리에서 이루어지네(詩爲交深坐上成)”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고려의 유습이 조선 전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 구절이다.

당시 음다 문화를 이끌던 계층은 승려들이었다. 그의 ‘증성철상인(贈性哲上人)’에 “차 마시며 상냥한 말 이어지고(煮茗接軟語)/무릎 맞대고 조용히 둘러앉았네(團圝初促膝)/현묘한 뜻, 노 선사에게 물어보니(玄機訊老禪)/은미한 말로 오묘한 비결을 붙잡는구나((微言扣妙訣)”라는 데서 확인된다.

특히 여말선초의 인물 이행(李行· 1352~ 1432)은 찻물을 감별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인물이다. 성현(成俔·1439~1504)은 그의 책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공(이행)은 물맛을 감별하여 충주 달천수를 최고로 쳤고, 금강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온 한강의 우중수를 두 번째 물로, 속리산의 삼타수를 세 번째로 꼽았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행이 괴애의 외조부였으니 그가 차를 즐긴 연유와 격조를 짐작하게 한다.

사후 문평(文平)이란 시호(諡號)를 받았고, 그의 증손 김락중이 그의 문집 『식우집』을 간행해 후세에 전했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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