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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시 고포마을 "17년째 교통사범 한명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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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각종 범죄가 판치는 요즘 17년째 범죄 없는 마을의 전통을 이어온 주민들이 있다.

경상북도와 경계한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 2리 고포마을의 18가구 33명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지난 1987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건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아 제 40회 법의 날(5월 1일)을 맞아 17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돼 오는 25일 법무부 장관상을 받는다.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 위해선 마을에 주소를 둔 주민 중 한 명이라도 폭력·절도 등은 물론 벌금형에 해당되는 교통사고도 내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춘천지검 관계자는 “주민 중 누구라도 사법기관의 수사 결과 혐의가 있다는 판결만 받아도 선정이 안될 정도로 까다롭다”며 “범죄 없는 마을이 되는 것은 주민 모두가 준법 정신이 투철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동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7번 국도를 타고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쪽으로 내려가다 도 경계 지점에서 해안 쪽으로 난 내리막길로 좌회전해 1분 정도 가면 나오는 이 마을 입구엔 지난해에도 범죄가 없었음을 알리는 ‘범죄 없는 마을’ 표지판이 서 있다.

이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담장이 어린이 키 높이밖에 안될 정도로 나즈막하고 대문은 아예 없다.

이웃집에 마실을 간다는 주민 최동기(74)옹은 “도둑이 없는데 문단속이 왜 필요하냐”며 “마을 주민들이 ‘범죄’라는 말을 잊고 산지 오래”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마을 주민들이 이같은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외지인의 유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8가구 중 2가구를 제외한 16가구가 이곳에 태를 묻고 살아온 토박이들이다. 그러다보니 마을의 최연소자가 53세이고 절반 이상이 70대 이상의 고령자다.

스무살에 시집와 5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는 천계춘(74)할머니는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부를 때 ‘누구 엄마’나 ‘누구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 ‘형수’‘계수’‘형님’으로 부른다”며 “성씨는 다르지만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서로 얼굴 붉히고 싸울 일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전통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도 남달랐다.

범죄 없는 마을로 첫 선정된 이후 4∼5년 동안은 외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까지 범죄 경력이 있는지 신원조회할 정도로 조사가 까다로웠던 만큼 주민들 스스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외지 생활을 하는 자녀들이 명절이나 휴가철을 맞아 집에 올 때마다 “절대 법을 어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한채숙(53) 부녀회장은 “마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선 경찰서나 파출소 문턱이라도 드나들면 안된다는 생각이 주민들 사이에 꽉 박혀 있다”고 말했다.

최동웅(65) 이장은 “사람 사는 동네에 왜 반목이 없었겠느냐”며 “그럴 때마다 역대 이장들과 윗사람들이 회의를 열어 서로의 잘못을 차근차근 얘기해 주며 화해시켰고, 지금도 이같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한동네 2도(道)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실개천을 복개해 만든 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각각 18가구씩 총 36가구가 한 마을을 이루며 행정구역상 강원도 삼척군에 속해 있었으나 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실개천 남쪽은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 6리로 떨어져나간 것이다. 경북 고포마을은 90년대 한차례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됐으나 그후 주민들 간의 사소한 다툼으로 전통을 잇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두 마을은 예전의 한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6∼7년 전 행정구역 통합을 추진, 주민투표까지 했으나 주변 마을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주변 마을들이 육지와 사람은 보내도 이 마을 앞 어장 (漁場)은 못준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고포마을 앞 바다는 수심이 얕아 햇빚이 잘 드는 데다 ‘너래방석’이라고 불리는 돌밭이 발달돼 이곳에서 나온 돌미역이 조선시대 때 임금에게 진상될 정도로 품질이 좋아 값도 다른 지역산보다 2배 이상 비싸다보니 다른 마을 주민들로선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삼척 고포 마을과 경북 고포마을은 요즘도 한 동네처럼 지내고 있다. 마을 경조사 때마다 함께 일을 치르고 마을기금도 공동 관리한다.

주민 대부분이 고령이다 보니 3∼5월 해녀를 고용해 미역을 따고 여름철 민박 운영을 하는 게 주수입원이어서 가구당 수입은 연간 3백∼4백여만원에 불과하지만 생활에 큰 불편이 없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최 이장은 “풍족한 살림은 아니지만 옛부터 웃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해온 마을 전통이 범죄 없는 마을을 만들어가는데 디딤돌이 된 것 같다”며 “범죄 없는 마을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주민 모두 노력하겠다”며 활짝 웃었다.

삼척=홍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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