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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최고야…"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며|장승들을 모신다|광주군 중부면 암미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마을에 도착하기 몇마일전에 우리는 길옆에 서있는 참으로 이상스런 모양을 한 것을 지나치게되었다. 거친 나무로 된 말뚝으로 되어있고 위쪽부분은 이상한 이빨을 가진 사람의 얼굴을 나타내는 매우 기이한 조각으로 되어있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것을 길과 마을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나라의 어디서나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1888년 우리 나라를 들른 영국인「W·R·찰즈」가 그의 『조선의 생활』에서 장승을 묘사한 것이다.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 뜨고 당장 『이놈』하고 달려들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벌름거리는 주먹코에 함지박 같은 입은 넉살좋고 익살스런 이야기꾼 할아버지 같아 옛날얘기 해달라고 떼쓰고 싶기도 한 얼굴이다.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사람의 발길이 드문 벽지에서나 볼수 있는 것이지만 마을이나 사원입구에 허정하게 서있는 장승을 보면 사뭇 향수가 끓어오른다..
마을의 수호신 격으로, 또는 사원경작지 이정표로서 마을이나 사원입구에 새워져있는 장승은 남녀 한쌍이 나란히 서있는 경우도 있고 통영의 독벽수와 같이 홀로 서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경기도광주군 중부면 암미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장승의 무리가 서있는 마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합쳐 16기 (기). 이 마을은 특히 새 장승을 만들어 세우며 부락제(부락제)를 지내는 풍습을 지켜가고 있어 장승에 얽힌 옛 조상들의 생활감정을 어렴풋이 나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마을이다.
부락제는 온 마을주민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3년마다 열리며 이때는 장승을 새로 깎아 세우고 장승제와 산신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어오고 있다.
산신제를 올리는 날은 음력 정월 초순쯤으로 마을회의에서 결정한다.
앞으로 2년간 마을의 복을 비는 제사인 만큼 준비는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기 한이 없다.
제사날은 반드시 손 없는 날이어야 하고 산신제와 장승제를 주관한 제관(제관)의 자격도 엄격히 시험된다.
우선 마을회의에서 제관에 추천된 몇사람을 놓고 그해의 천기(천기)와 후보자들의 나이에 나타난 천기를 맞춰 2∼3명을 가린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제관 될 안사람도 생기복덕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해서 제관후보자 내외의 나이를 다시 넣어 최종 두사람을 뽑는다.
이중 가장 좋은 사람이 산신제의 제관이 되고 다른 한사람이 장승제의 제관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제의 제단을 당주 (당주), 장승제의 제관을 화주(화주)라고 부르는데 당주나 화주로 뽑힌 사람은 그날로부터 내외를 삼가고 홀로 떨어져 생활하며 문밖출입을 삼간다.
담배도 물론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실 수 없다.
또 하루 한번 이상 목욕을 해서 몸을 정 (정) 하게 한다. 외출을 금지하는 것은 밖에 나가면 험한 것을 보고 듣게돼 부정(부정) 탄다고 믿는 때문이고, 제물을 준비하는데도 조상 때부터 내려온 법도와 차례를 엄격히 지킨다.
제사에 쓸 술은 마을에서 빚어 쓰는데 제일 (제일) 3일전 저녁 어스름 무렵에 쌀 5홉을 찌고 여기에 누룩 5홉을 섞어 산에 묻은 항아리 속에 담근다.
밤 곶감 대추 등 기타 제물은 제사당일에 화주가 직접 장에 나가 사다 산신제에 쓸 것은 당주집에 가져가고 나머지는 화주가 보관해 일반인의 손이 닿지 않도록 주의한다.
장승을 깎는 나무는 예부터 물오리나무를 써왔다. 손재주 좋은 사람이 장승을 깎는데 톱과 끌 자귀 등을 사용한다.
마을의 최고령인 공대섭씨(72) 는 『이런 장승제가 4백여년을 끊이지 않고 내려온 것으로 알고있다』며 『장승은 마을의 파수병으로 온갖 마귀와 질병, 화로부터 마을을 지켜준다』고 힘주어 말했다.
공씨는 『장승이 세워진 위치로 그 장승의 역할을 알 수 있다』며 『마을 어귀에 세워진 것은 부락의 수호신이요, 마을안에 세울 때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지맥 (지맥) 이 허한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라올 주민 이상호씨 (63)는 『제사때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크고 작은 우환거리가 생긴다』며 『제사를 통해 개인은 마음의 평정을 얻고 부락은 안녕과 질서를 유지해온 것이 아니냐』며 옛 조상들이 해오던 제사를 잊지 않고 본받아서 이어갈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지의 발달로 인한 민속신앙의 소멸과 함께 장승은 점점 자취를 감추어 가고있다. 특히 72년 전국적으로 행해진 새마을운동과 함께 대량 뽑혀져 우리네 선조들이 마음의 안위를 찾았고 정성을 들였던 옛풍물은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광주=정강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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