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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배우로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중앙일보

입력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메이즈 러너`에서 한국식 이름을 지닌 강인한 소년 `민호`를 연기한 배우 기홍 리.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메이즈 러너’(원제 The Maze Runner, 9월 18일 개봉, 웨스 볼 감독)는 이유도 모르고 특정 지역에 갇힌 채 매일 모습이 달라지는 미로를 통해 탈출을 모색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그 중 강인한 소년 '민호'를 멋지게 소화한 배우 기홍 리(24). 서울 태생으로 5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여러 TV드라마 조연을 거쳐 당당히 이 블록버스터에 합류했다. “순두부찌개를 잘 끓이고, 배우 송강호를 존경한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를 8월말 미국 베버리힐스에서 만났다.

-어떻게 캐스팅됐나.

“에이전트에게서 이 작품에 대해 듣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갔다. 원작 소설을 사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곧바로 민호 캐릭터에 매료됐고, 꼭 이 역할을 맡고 싶었다. 출연이 최종 결정되기까지 여덟 번쯤의 오디션을 봤다. 지금도 꿈만 같다. 촬영하다 생긴 상처와 흉터를 보면서 민호를 연기했다는 걸 실감한다.”

-촬영장에서 각오가 남달랐겠다.

“새벽 5시든 밤 12시든 내 촬영 순서라고 불러만 주면 ‘네’하고 달려나갔다.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일도 잦았다. 촬영지가 덥고 습한 지역이라 분장을 마치자마자 땀에 젖는 게 예사였다. 하지만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았다는 기쁨에 현장을 즐겼다. 또래 배우들과도 매일 촬영이 끝나면 같이 밥을 해 먹는 등 가족처럼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민호는 제임스 대시너의 원작 소설 팬들에게도 가장 인기 높은 캐릭터인데.

“팬들이 SNS를 통해 ‘어이, 민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야. 잘 해내리라 믿지만, 날 실망시키진 않는 게 좋을 걸’ 하는 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들만큼 민호 캐릭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반응이 나쁘지 않다.”

-극중 인물들은 과거의 기억이 삭제된 상태다. 캐릭터를 분석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겠다.

“맞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늘 가족을 지키고 보호한 내 아버지의 이미지를 민호에 투영했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우리 가족은 어디 가든 먹고 살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민호는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가족 같은 친구들을 위해 매일같이 미로 속을 달렸을 테고, 탈출 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캐릭터다. 그렇게 연관을 짓고 나니 민호를 이해하는 게 조금은 쉬워졌다.”

-‘헝거게임’시리즈(2012~) 등 10대~20대를 겨냥한 비슷한 장르의 다른 영화와 비교해 ‘메이즈 러너’만의 특징이라면.

“모든 캐릭터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쳐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들에선 서로 살기 위해 짓밟고 싸우지 않나. 물론 이 영화에도 갈등 요소가 있지만, 바깥 세상을 꿈꾼다는 점과 공동체를 위한 선의를 지닌 점에선 한마음이다. 뭔가를 이루고 싶다면 서로 짓밟고 싸우는 게 아니라 의견을 나누고 합심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할리우드에서 동양계 배우로 살아남는 게 쉽진 않을 텐데,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동양인이라서가 아니라 배우로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 같다. 다행히 부모님이 처음부터 전적으로 믿고 응원해주신 게 큰 힘이 됐다. 전업 배우가 된 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생일 카드에 ‘지금의 성과에 연연하지 마라. 무슨 일이든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항상 기도해 주마’라고 써주신 걸 보고 힘을 냈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이야기, 매력적 배역을 쫓아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베벌리힐스=LA중앙일보 이경민 기자 rache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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