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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186)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53)|한표욱|제네바 정치회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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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소·영·불 4개국이 한국문제를 위한 경치회담을 제네바에서 열기로 합의한 것은 판문점예비회담이 결렬된 지 약 2개월 후였다.
1954년 2윌18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서베를린에서 소집된 4개국 외상회의는 그 회의 자체의 성과는 별로 없이 끝내면서 그 대신『한국문제와 인도차이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월26일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베를린회의의 결정은 우리의 동의가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소식에 접한 한국은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결정에서 소외됐다고 해서뿐이 아니었다.
우선 제네바회의는 휴전협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휴전협정은 협정조인 3개월 째인 53년 10월26일 정치회담을 열도록 규정했으나 이에 따라 열렸던 판문점예비회담은 결렬돼 버렸던 것이다.
둘째 휴전협정에 규정된 경치회담의 참석범위를 놓고 유엔총회와 판문점 예비회담에서 한국이 그토록 참석을 반대했던 소련이 제네바정치회담에는 주최국의 하나로 격상되는 것이 못마땅했다.
변영태 외무장관은 즉각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네바회의 같은 것은 하등의 이가 없고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다』『공산주의자들은 목적달성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또는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만 국제회의에 참석할 뿐이다.』
한국은 판문점예비회담 때 공산 측의 억지태도와 미국 측의 완강한 태도 등으로 인해 회담이 결렬되자 미국이 앞으로 소위 정치회담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 전쟁재개 쪽으로 결심을 굳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베를린4개국 외상회담 결정은 큰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부정적 태도에 대해 미국은 물론 할 수 있는 데까지 참가를 종용했다.
미국은 한국이 정치회담에서 국가이익이 희생당할 것이라는 우려를 갖는데 대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아이젠하워」대통령이 직접 이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미국은 이 정치회담에서 한국의 국가이익을 절대 옹호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미국의 이 같은 보증을 받은 한국은 태도를 완화했다. 이대통령은 제네바정치회담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4월19일 회담참가 결정을 성명으로 발표하고 미국에도 이를 통고했다.
미국의 보증도 있었지만 한국통일의 기회를 우리 정부가 막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정치적 판단도 고려된 것 같았다. 뉴욕 타임즈 지가 한국정부의 회담참가결정에 관한 통고를 크게 보도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국대표단이 비교적 성대한 출 영을 받으며 제네바에 도착한 것은 개막을 사흘 앞둔 4월23일 하오 2시(현지시간). 서울로부터 변 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하여 홍진기 법무부차관·최정자 동국대 교수·이수영 외무부 정보국장·한유동 외무장관 비서실장·손병식 외무부의전과장, 유호룡 속기사·이주범 한글타자수 등 8명이, 그리고 미국에서 양유찬 주미대사·임병직 유엔대사가 합류했다. 대표단으로는 소규모였다.
이에 비해 북괴는 비행기 4대를 채운 인원이 도착했다. 1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기세를 올리자는 의도였다. 소련은 2백 명, 중공은 3백 명이었다. 보도진도 9백 명이나 되었다.
제네바는 각국 대표단과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새통이었다. 호텔은 모두 만원이었다.
우리대표단은 미 대표단의 선발대로와 있던「케네드·영」국무성극동국장·「캘훈」주한미대사관 1등 서기관·「카읜」주 제네바 미 총영사 등의 마중을 받으며 그들을 통해 미리 정해 놓은 호텔드파미유에 투숙했다.
한국대표단이 검소하고 조용히 행동한데 비해 북괴는 대표 남 일이 1만 명 정도의 호화별장을 얻어 쓰고 5명의 미모의 여자수행원들도 데리고 왔으며 매일 밤 파티를 여는 등 허세를 부렸다.
남 일은 공항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이 코멘트를 요청하자 함구했다. 중공대표 주은래도 노코멘트였다. 그러나 그후 도착한 소련대표「몰로토프」의장이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주은래와 남 일이 차례로 성명을 냈다. 성명발표 순서를 재미있게 생각한 서방기자들이『큰 개, 중개, 강아지』로 비유하면서 중공·북괴의 소련추종자세를 비꼬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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