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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품 된 피서약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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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편은 올해도 여름의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다.
방학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피서를 간다는 약속을 했다.
믿기 지 않아 묻고 또 묻는 아이들에게 남편은 큰 소리를 쳤다.
4박5일 예정으로 남해로 떠난다며 날짜까지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해고속도로를 거쳐 설악산도 들르는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은 방학을 하기 전부터 마음이 부풀어 딸아이의 일기장에는 방학을 기다리는 마음과 아빠가 들려준 바캉스 계획이 자랑스럽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애초부터 남편의 그런 얘기들을 신명나게 듣지 않았다.
계속되는 불경기로 어려운 요즈음 피서 갈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자는 나의 말을 남편은 한 귀로 흘려 버린다.
『산다는 게 무엇인데, 즐기며 사는 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이야.』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어느 사이 머릿속으로 하나 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흉작으로 비싼 마늘을 여기보다 싸면 몇접 살 생각과 빛깔 좋은 멸치도 한 포 살 작정을 했다.
수영복·모자·타월·튜브 등을 준비하고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막상 방학을 하고 떠난다는 날짜가 다가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동안 뜸했던 남편의 사업이었는데 갑자기 건물의 내부공사를 맡게 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저렴한 공사비로 계약한 남편은 힘들었지만 보람으로 즐거워했다. 그리고 피서 얘기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딸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불평했다.
『피서보다는 아빠 일이 더 중요하지.』
보름을 벼르던 남편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풀죽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 역시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었다.
풀에나 데려갈까 했지만 콩나물 시루 같고 구정물 같은 풀에서 아폴로 눈병이라도 옮을까 두려워 아예 포기해 버리고 목욕탕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풀을 대신하게 했다.
마루에 깔아 놓은 돗자리 위에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차가운 수박을 쪼개어 먹으면서 바닷가가 부럽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무조건 집을 떠나면 좋아했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로 몇만의 인파가 몰렸다는 해수욕장의 기사를 읽으며 이 더위에 피서 간다고 집을 떠나는 것은 더위를 마중 가는 것과 같다는 조간신문의 글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해질녘쯤 서점에나 들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나 사서 실망한 마음을 달래 줄 예정이다.
어려운 일을 맡으려고 목이 쉰 남편에게는 약 병아리라도 한 마리 잡아서 인삼 한 뿌리, 찹쌀 한 줌 넣어 푹 고아 몸보신시키는 일로 나는 여름을 빚으리라.
내년에는 더 멀리 제주도로 떠나는 꿈을 꾸며 말이다.
엄기영<안양시 비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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