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충고, 기업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잘해보자는 고언에 협박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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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손회장이냐?』
『…』
『성하게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
-한밤 중 어처구니없는 욕설과 협박전화를 받으면서 소비자 운동이 앞으로 겪어야 할 적지 않은 어려움을 피부로 느낀다.
고등학교까지 중국에서 자란 나는 그곳 중국인들의 신용있는 상거래를 잘 알고 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계약에 문서를 동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한 한마디의 언약-그것이 계약이며 그 계약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지게 되어있다.
생산자·상인·소비자 사이에 신용과 양심이 지켜지고 있다면 소비자 운동도 왕 소비자들의 목소리도 결코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은 남북의 상황을 고려해가며 한편 고도경제성장을 지향해왔기 때문에 사실 기업인들의 독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독주에 그런 대로 제동을 걸고 있었던 것이 물가를 통제해 온 정부의 그동안의 경제 정책이었다.
지난 15년 동안 여성단체들을 중시한 소비자보호운동이 고발이나 소비자 의식개발 중심으로 성장해온 것은 다행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 정도의 성장만이라도 없었다면 가격자율화로 빚어지는 요즘의 상황에 소비자들은 더욱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되뇌는 말이긴 하지만 그동안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가격정책만 있었지 유통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책은 없었다.
가격을 자율화시켜 기업의 경쟁발전을 도모하리라는 공정거래법의 취지에는 별다른 반론을 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가격자율화 이전에 유통구조의 개선은 이루어졌어야 했던 것이다.
농수산물의 유통이 10개 이상의 과정을 거친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질, 생산자는 생산자대로 제값을 못 받고 소비자는 중간상인들의 농간으로 엄청난 값에 물건을 사야하는 현실을 그냥 둔 채 가격자율화를 시행했으니 소비자가 겪어야할 고통은 그만큼 크게 되었다.
또 그동안「억제」라는 현상으로 억눌려 있던 물가는 그 억제가 풀림으로 해서 자동적인 뜀뛰기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새로운 경제질서가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소비자들이 새로운 경제질서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된 다는 부담을 지게된 셈이다.
공정거래법의 시행과 더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생산자·기업의 소비자에 대한 의식이 보다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무시하다 시피 해온 소비자에 대해 보다 올바른 이해를 하고 소비자를 늘 염두에 두어야 앞으로 기업이나 나라가 함께 살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비자 단체에서 그들의 상품에 대해 장단점을 지적하고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해 주면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가 그들에게 필요하다.
소비자단체의 이같은 충고를 마치 자기회사를 망하게 하려 한다거나 모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앞으로 해결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게 된다.
소비자의 음성은 기업의 양심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질 수도 있다.
기업이 양심적이라면 그 목소리가 높을 리 없을 것이고 기업이 비양심적이라면 자연 소비자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비자보호단체 협의회에서 지난 7월30일 새경제 질서에 대처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것도 작금의 물가문제나 기업인들의 양심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생산자가 모두 비양심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 가운데 이미 소비자에 대한 의식에 눈뜨고 양심적인 기업운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소비자보호운동은 결국 생산자·상인·소비자 모두가 잘살자는 운동이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기업이 국제경쟁사회에서 어겨낼 수 있는 체질을 기르도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얄팍한 상술과 비양심적 기업운영으로는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중공은 이미 산업체제를 다져 나가고 있다. 그들이 세계시장에 침투하기 시작할 때 그들을 이길 단 한가지 방법은 질 좋은 상품을 양심적으로 만들어 신용 있게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소비자들은 기업에 늘 충고와 격려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의 경제질서를 위해 소비자들이 해야할 일은 이처럼 많다. 하지만 아직도 소비자 단체는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다.
지난번 한국부인회의 식용유 사건 이후 많은 연구소들이 소비자단체에서 의뢰하는 실험을 기피하고 있다.
우리들에겐 아직 상품을 자체 실험할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때문에 지금 무엇보다 소비자단체에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이 실험시설이며 정부에서 시장감시기능을 소비자들에게 맡긴 만큼 소비자단체에 실험실을 만들어 줄만한 배려는 있어야한다.
또 지금까지 소비자 운동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주로 참여해 왔는데 앞으로는 모든 소비자가 그 권익을 위해 참여하는 운동이 되어야겠다.
여기에 생산자 역시 소비자의 한사람인 만큼 그들 역시 이 운동에 참여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소비자들의 각성과 함께 소비자는 기업이나 생산자·상인의 양심이 일깨워 질 때까지 계속 그 목소리를 높여가야 한다.
그것이 나라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인실<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 회장>
▲1917년 서울출생
▲1922∼1935년까지 중국에 살면서 초·중·고등학교 졸업
▲1939년 이화전문학교 졸업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부녀국장
▲현 대한YWCA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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