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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아버지 아직도 미워 … 칠순 앞둔 작가 '명절 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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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소설가 김원우씨는 현대사의 피해자다. 남로당원이던 아버지가 6·25전쟁 중 월북하는 바람에 성장과정에서 고통이 컸다. 김씨는 “통일이 돼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누그러들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족과 고향을 돌아보는 추석이다. 동구 밖 미루나무, 서늘한 가을 하늘…. 추억의 공간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신경림의 시 ‘파장(罷場)’에서처럼 세파에 시달린 못난 이들, 오랜만에 만나 얼굴만 봐도 흥겨운 계절이다.

 하지만 추석이 달갑지 만은 않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소설가 김원우(67)씨가 그렇다. 그는 “명절이면 특유의 씁쓸한 맛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6·25전쟁 중 홀로 월북해 남은 가족들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아버지 때문이다.

 김씨는 형 김원일(72)씨와 함께 형제 소설가다. 그의 아버지는 남로당 고위직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기울자 1950년 9월 월북했다. 형 원일씨는 한국전쟁을 다룬 장편 『불의 제전』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시도했다. 하지만 동생 원우씨는 작품으로나, 말을 통해서나 아버지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김씨가 입을 열었다. 3일 오후 서울 길동 작업실에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직 남아 있었다. 뜻밖이었다. 가족을 팽개치고 이념을 좇은 아버지였다. 홀어머니와 자식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자기 성격의 삐뚤어진 부분은 아버지 탓이 크다는 말도 했다. 김씨의 아픔은 사소한 개인사가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가 국민 전체의 가슴에 남긴 ‘공동 트라우마(정신적 상처)’의 다른 이름이었다.

 -형과 달리 아버지를 작품으로 다룬 적이 없다.

 “사실 아버지를 잘 모른다. 내가 세 살 때 월북했다. 내가 자신을 닮았다고 굉장히 좋아했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상(像)이 거의 없다. 형이 많이 다뤄서 나는 일부러 거리를 뒀다. 작가가 가족 얘기를 할 수 없으니 불리했지만 오히려 ‘지적인 세태 고발 소설’이라고 자부하는 지금의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 같다.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영끼 많은 이념주의자였다. 공산주의 운동합네 하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 우익에 밀려 출세 못한 데 대한 앙심이나 분풀이가 한편에 있는 가운데 소년적인 감상에서 신념을 좇으며 살았던 것 아닐까. 가족은 뒷전이다 보니 홀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의 삶은 끔찍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삶의 스트레스를 자식들에 대한 매로 풀었을까. 그러니 아버지가 진절머리 나게 밉다고 할까. 증오와 분노 비슷한 감정이 70∼80%다. 쉽게 포용하지 못하고 사람사귐에 인색한 내 성격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재혼해 오누이를 뒀다고 들었다. 그들을 꼭 만나고 싶다. 그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

 -아버지 소식은 알고 있나.

 “한 북한연구기관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아버지는 80년대 초반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80년 남한에서 돌아가셨으니 그보다 한 두해 후인 듯 하다. 돌아가신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제사를 못 지내고 있다. 기일(忌日)조차 모른다. 가족관계기록부에서 아직 아버지 이름을 지우지도 못하고 있다. 형과 차례·제사를 나눠 어머니 제사는 내가 드리지만 명절 차례는 형이 지낸다. 추석에 밥 한 그릇 올려 놓고 추도예배 드리면 문득문득 생각 난다. 한때 숙청됐다가 복권됐다고 하는데 계속 찬밥 대접만 받다가 가슴 속에 응어리를 안은 채 병사한 건 아닌가. 혹시 북한의 자녀들도 우리처럼 고생은 안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생 자체랄까, 명절 특유의 씁쓸한 맛을 뼈저리게 느낀다. 형이나 나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 돌아온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할 방법이 있나.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 분단 모순으로 인해 한국인의 심성체계가 과거와 달리 많이 꼬이게 됐다고 생각한다. 아까 얘기한, 내 성격의 뒤틀린 부분도 역시 넓게는 분단 때문 아닌가. 우리 사회의 진보·보수 갈등, 세월호를 둘러싼 대립 역시 분단이 가져온 현상들이다. 체제에 대해 단 한 가지도 긍정하지 않으려 하고, 어느 정도 법이 그렇게 돼 있으니 믿어도 될 것 같은데 얼토당토 않게 법 위의 법을 요구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사람의 이념처럼 바뀌기 쉬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생활 조건이 약간만 달라지고 적당한 계기가 생기면 쉽게 달라질 수 있는 게 이념이다. 남북 체제에 변화가 오면 사람들의 심성은 어렵지 않게 바뀌리라 생각한다.”

 -세월호 유가족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한국은 여론정치에 의해 너무 흔들린다. 개인의 정체성은 흔들려봤자 개인의 문제이지만 국가는 다르다. 큰 대의를 세웠다면 웬만한 잔가지는 쳐버리고 수용할 건 수용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는 죽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식의 이상한 에고이즘(개인주의)이 사회 밑바닥을 흔드니까 세월호 처리를 둘러싼 대립이 장기간 소모적으로 흐르는 것 같다.”

 김씨는 2011년 3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 정년을 1년 남기고서였다. 3기였지만 다행히 임파선으로 번지지는 않아 대구 동산병원에서 25㎝를 잘라내고 항암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맥주나 막걸리도 가끔 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셈인데 두렵진 않았나.

 “수술 직전의 공포는 말로 못한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항암치료 받으러 대구로 내려갈 때는 별별 생각이 다 나더라. 쓰고 싶은 글, 할 일이 많다는 최면을 자꾸 걸었다. 요즘은 한층 엄격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오전 4시면 일어나 한 시간 맨손체조, 한 시간 반 신문 읽고 나서 원고 10쪽을 쓰고 나면 오후 2시다. 6시까지 책 보다 귀가한다. 2012년 정년 퇴임 후 한 해 한 권씩 책을 냈다. 에세이·소설 이론서·역사소설 등 이전에 안 쓰던 장르들이다. 소설도 그렇지만 다른 장르에서도 한국은 근대성·세계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본다.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을 쓰는 게 목표다.”

 -한국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는 있나.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내놓아야 하는데 한국 소설은 자꾸 어리광을 부린달까 타협하려는 것 같다. 독자도 의식한다.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을 더 신랄하게 까발려야 한다. 그러려면 남북 분단 모순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 어렵다. 작품은 번역하면 1급인지 아닌지 수준이 금세 드러난다. 소설은 아직 세계적인 수준을 못 따라간다. 시(詩)에서 미당 서정주(1915∼2000)같은 사람은 세계적이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원우=1947년 경남 진영 출생. 77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무기질 청년』 『객수산록』, 장편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 『부부의 초상』, 일본 문화 에세이인 『일본 탐독』 등을 썼다. 동인문학상·동서문학상·대산문학상 등 수상. 세태에 대한 거침 없는 비판, 익살스러운 풍자 등을 곁들인 특유의 스타일로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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